![]() | 한낮인데 어두운 방 (양장) 에쿠니 가오리(Kaori EKUNI), 신유희 | 소담 | 20130625 평점 ![]() ![]() ![]() ![]() ![]()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한낮에도 어두운 방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내 방이 그렇다. 남향인 집의 가장 안쪽에 있어서 낮에도 빛이 환히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읽기엔 좀 불편해도 눈을 감고 쉬거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기엔 더없이 좋다.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한낮인데 어두운 방>의 제목을 보며 그런 내 방이 떠올랐다. 그리고 책 속의 방주인은 누구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 혹은 그녀도 어두운 방에서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기며, 휴식을 취하겠지?
대학 때부터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그 이유를 물어오면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또는 ‘특유의 느낌’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아마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에쿠니 가오리의 팬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쓴 소설 여러 작품을 읽어왔지만 이번 책만큼 순식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특별히 속독한 것도 아니건만 248쪽의 책을 두 시간 남짓 걸려 완독했다. 이렇게 빨리 읽히고 또 쉽게 이해된 이유는 이전 작품들과 다른 서술 방식 때문인 것 같다. 우선 종결어미는 ‘-ㄴ다/-이다’ 대신 ‘-ㅂ니다’를 사용하고 있다. 도입부만 짧게 그런가 싶었는데 끝까지 이 방식으로 서술돼 마치 어린이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화작가이기도 한 작가가 이번에는 성인소설에도 서술어를 이렇게 사용한 것이었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본 등장인물들의 심리도 쉽고 섬세하게 그려보인다. 그것이 책의 몰입과 이해도를 한층 높여 준다.
가업을 이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히로시와 결혼해 전업주부의 삶을 사는 미야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가사 일이 그녀의 일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퇴근한 남편의 관심사는 허기진 배를 채워줄 저녁 메뉴와 TV, 신문 따위가 전부였다. 대화를 원하는 아내의 말 중에서도 본인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재주를 가진 히로시에게서 미야코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동네에 사는 외국인 남자 존스가 서서히 다가온다.
동양미에 대한 일종의 동경을 가지고 있던 미국인 존스는 일본에서 대학 강사를 하며 살고 있다. 한 동네에 사는 아담한 일본 여인 미야코를 본 순간 그는 작은 새를 연상하며,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미야코도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이 없어서 그와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아나갔는데 어느 날 존스가 ‘필드워크’라는 산책을 제안하면서 둘의 관계는 변화를 맞이한다. 어떻게든 미야코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던 존스야 그렇다 치지만 미야코는 존스와 함께하면서부터 새로운 사랑의 감정과 떨림, 교감, 소통 등을 느끼기 시작한다. 감정적인 유대감으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데 존스와 달리 미야코는 남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까진 차마 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혼 여성이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남편에게 뭔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선지 미야코는 존스와 만난 날엔 어김없이 퇴근한 히로시에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듯 이야기 했다. 히로시는 이 때도 어김없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해 버렸지만...
미야코와 히로시의 관계는 권태기에 접어든 여느 부부들과 다르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히로시는 왜 아내를 붙잡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사랑이 식어버려서, 아내를 다시 붙잡을 만큼의 열정조차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없었던 일인 양 묵과함으로써 다시 예전 같기를 바라는 히로시의 단순한 발상은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생각의 차이가 큰지 여실히 보여준다. 남편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이미 알아버린 자신의 갈망과 열정 사이에서 잠시나마 갈등하는 미야코의 심경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어찌 보면 욕망에 굴복해 버린 어느 가정주부의 그저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주부의 일상과 결혼의 권태, 사랑의 시작과 끝의 모습을 이번 작품에서도 에쿠니 가오리식으로 잘 풀어내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게 잘 읽히는 책이다. 역자의 말처럼 마지막 존스의 심경을 나타낸 한 문장은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고, 너무 이른 사랑의 결말이어서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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