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리스트 데이비드 고든(David Gordon), 하현길 | 검은숲 | 20130624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스릴러 소설을 읽기에 딱 좋은 계절에 데이비드 고든이란 낯선 작가의 첫 번째 소설 <시리얼리스트>만났다. 책 제목의 ‘시리얼리스트’란 연재 작가라는 뜻인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1위, 미스터리가 읽고 싶어 1위,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까지 일본 미스터리 역사상 최초의 3관왕이라며 화려한 수식어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연 이 작품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을 비껴갈 수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소위 말하는 B급 작품만 주로 쓰는 해리 블로흐는 변변한 히트작 하나 없는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쓰는 삼류 소설가이다. 그동안 그가 쓴 작품들도 그저 그런 뱀파이어, SF, 탐정 소설들과 포르노 잡지의 칼럼 등인데 작품마다 예명도 제각각이다. 한 때는 시 쓰기를 좋아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던 그였지만 이제 해리에게 글쓰기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가 호구지책으로 삼은 아르바이트가 하나 더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논술 개인지도 교사라 할 수 있다. 꽤 좋은 보수에 일은 어렵지 않아 시작한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당돌한 10대 소녀 클레어를 만나게 됐다. 클레어는 자신의 작문 숙제를 해리에게 일임한 대신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리의 매니저를 자처한다. 그리고 그날도 일상처럼 해리에게 온 우편물들을 전했고, 그 속엔 싱싱교도소에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 대리언 클레이의 편지도 함께 있었다.
토막 살해한 여성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 ‘포토 킬러’로도 불린 대리언은 해리에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한다. 자신에게 팬레터를 보내온 네 명의 여성을 직접 만나 인터뷰해 보고 그녀들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것. 그 대가로 대리언은 해리에게 자신의 자서전에 대한 독점권을 주겠다고 한다. 사형 직전에 있는 희대의 연쇄살인범, 그가 죽으면 유일한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리도 그토록 열망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피해자 가족들을 생각해 이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는 해리. 그러나 무능력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연인과 그녀의 남편에게 자극을 받은 나머지 해리는 대리언 클레이의 제안을 자랑하듯 공표해 버림으로써 클레이의 덫에 걸리고 만다. 이후 해리가 팬레터를 보냈던 여성들을 만나고 숙제 검사를 받듯 대리언을 찾아가 포르노 소설을 읽어주기까지 <시리얼리스트>는 다소 지루하게 전개 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 책의 긴 전주곡이었다.
사건의 본격적인 시작은 중반 이후 팬레터를 보낸 여성들이 과거 대리언의 연쇄살인 방식과 똑같은 형태로 처참히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부터다. 그리고 그 제1의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해리였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번 살인사건 발생 시점에는 수감 중이었던 대리언의 확실한 알리바이때문에 과거 범죄마저 무죄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라도 해리는 범인을 찾아야 했다. 그런 그를 클레어와 과거 대리언에게 쌍둥이 언니를 희생당한 다니엘라가 도와준다.
책에서는 해리가 필명으로 그간 썼던 다양한 작품들이 액자식 구성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고든의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해리는 저자 데이비드 자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고든의 현실과 그의 소설적 상상력이 결합해 <시리얼리스트>가 탄생된 것이고, 이 책은 마치 저자의 포트폴리오 같다. 게다가 해리가 대리언을 위해 쓴 포르노 소설까지 등장하니 총천연색의 이야기들이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매우 독특한 구성이다. 그래서 <시리얼리스트>가 재밌었냐 묻는다면 솔직히 내 취향에 맞는 책은 아니었고, 스릴러 소설로서의 재미도 크게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범인의 정체가 쉽사리 드러났던 것도 아니고, 다소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진데다 마지막에 번외 살인 사건까지 나름의 반전도 있었다. 그러나 범인과 이를 추적하는 사람 간의 두뇌싸움이 책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경찰이나 FBI 같은 전문가들이 아닌 해리 일행의 추적이 뭐 그리 긴장감 넘치겠냐만 그래도 스릴러 소설의 재미는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범인과 그로 인해 마지막까지 알쏭달쏭한 범인의 정체에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재미가 확실히 부족하다. 그리고 모두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해리 외에는 특별한 제2의 용의자도 없고, 다니엘라가 해리에게 언뜻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지만 그것도 흐지부지하다.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일본문학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일본에서 손꼽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여 기대가 컸었는데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개인적인 취향일 뿐 혹자는 새로운 형태의 스릴러 소설을 만났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럴만한 요소는 충분히 가진 작품이고,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툭툭 터져나오는 작가의 유머는 책의 양념같은 요소였다. 또 일본에서는 책의 인기에 힘입어 "이류소설가"란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됐다고 하니 나중엔 영화를 한 번 봐야겠다. 그러나 끔찍해도 너무 끔찍했던 대리언의 범행 현장은 더 이상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책에 묘사된 잔인한 장면들은 부디 적절한 수위로 조절되었기를 바란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