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2 세트 최문희 | 다산책방 | 20131105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올 봄, 난생 처음으로 제주도를 갔다. 처음이라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짧은 기간 동안 꽤나 빡빡한 관광 계획을 세우고 섬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여행 3일째 되던 날, 서귀포를 지나는데 도로에는 이중섭 미술관을 표시한 안내판들이 곳곳에 보였다. 근처에 그 유명한 이중섭 미술관이 있나보다 생각하였지만 차를 멈추지는 않았다. 이번 여행 일정 속에 이중섭 미술관은 없었거니와 이 천재 화가에 대해 평소 큰 관심도 없던 탓이다. 그런데 제1회 혼불 문학상 수상작 <난설헌>으로 알게 된 최문희 작가가 내놓은 신작이 내가 지나쳤던 그 대향 이중섭이었다. 몰라서 무관심했던 이중섭을 소설로나마 만나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전 2권의 <이중섭>에서는 천재 화가 이중섭의 가난한 사랑과 늘 허기지고 목말랐던 작품 세계를 들려주고 있다. 이중섭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어서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마지막에 작가가 밝힌 한 인물은 확실히 허구라는 정도... 그러나 최문희 작가도 실존 인물을 소설화한 것인 만큼 대부분은 사실을 바탕으로 약간의 허구성을 가미한 것이리라. 그래서 장편소설 <이중섭>을 마치 평전을 읽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이야기의 시작은 2012년 11월, 이중섭 화백의 일본인 아내 남덕(야마모토 마사코)이 둘째아들 태성과 함께 이중섭의 유품인 팔레트를 기증하러 제주에 오면서부터였다. 피난 생활로 찢어지게 가난해도 온 가족이 잠시나마 단란했던 곳 제주에 온 남덕은 남편과의 추억이 서린 장소를 볼 때면 과거를 회상한다. 하지만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그녀의 기억 속에 행복만 엿보인 건 아니었다.
일본 유학시절 학교 후배로 만나 연인이 된 야마모토 마사코는 이중섭에게 먼저 성큼 다가올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여성스러움에 호감을 느꼈던 중섭은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처음에는 중섭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마사코의 집안에서도 중섭의 화가로서의 장래성을 인정하며 둘의 사이를 허락하고 현해탄을 건너 북한 원산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애하던 때와는 달리 결혼은 그야말로 현실이었다. 삼시 세끼를 먹어야 했고, 보살펴야 하는 두 아들도 태어나면서 중섭은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중섭은 늘 그의 그늘에 있는 가족보다 주변 사람들이 우선인 것 같았다. 마사코도 그런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종국에는 생계가 막막한 지경에 이르러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귀환하는 것. 당시로선 그것이 그녀가 아이들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여자의 입장에서 작품에 몰입해 읽다 보니 매번 남자의 체면을 내세우는 중섭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입장이 되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렇게 귀한 돈을 그런 식으로 물 쓰듯 할 수는 없었을 텐데 집 밖에만 나가면 중섭의 안중에 가족은 없었던가 보다. 게다가 중섭의 주변에는 늘 여자도 끊이지 않았고, 또 그 시대에는 그것이 큰 허물도 아니었던지 친구들이 먼저 나서서 중섭에게 여인들을 권하기까지 한다. 예술가의 남다른 기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절제한 삶을 사는 중섭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자유분방함이 그의 창작에 원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소의 화신으로 유명한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그의 관찰 대상은 대부분 자연이었다. 그 중에도 소에 대한 그의 애착과 관심은 ‘소’라는 동물에서 민족의 굳센 기상을 발견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중섭의 소는 어머니이고, 친구이고, 우리 민족이다. 그것을 그리 복잡하지 않는 점, 선, 면으로 오롯이 표현해 내고 있기에 이중섭의 작품은 높게 평가 받는 것이다. 그림을 팔아도 그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 대금마저도 중간에 가로채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쩌다 수중에 돈이 들어와도 늘 쓰고 없애 버린 이중섭이기에 그림 재료를 구입할 형편도 못됐다. 그런 그가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종이는 담배를 싼 은박지였다. 술과 담배를 즐겼던 그에게 은박지에 눌러 그린 스케치들은 이중섭만의 은지화로 재탄생 되어 오늘날에는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중섭의 생전에 가족과의 재결합은 끝내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무책임한 남편에게 아내는 실망감이 컸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가족과의 행복한 재회를 꿈꾼 중섭에게 처가의 냉대는 자존심에 적잖은 생채기를 남겼다. 중섭의 마음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은 중섭의 이기적인 욕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간 가족의 생계 따위는 모른 척 살고 싶은 대로 살아왔으면서 가족들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 반가이 맞아줄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또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중섭도 가여운 인생이다. 그나마 그의 곁에 혈연보다 진한 사랑과 우정을 보여준 구상이라는 은인이 항상 있어주었으니 그것은 이중섭의 인복이었다. <이중섭>을 통해 인간 이중섭의 뛰어난 재능과 그의 작품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 그리고 그의 가정사까지 알게 되면서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한 느낌이다.
책을 덮고 나서 자연스럽게 이중섭 미술관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갤러리의 그림들은 작은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어 많이 아쉽다. 친구 김병기가 소개하는 대향 이중섭에 대한 글과 그의 연보 등을 살펴보며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과 묘하게 겹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제주는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이중섭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