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 나무옆의자 | 20140523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학창시절, 새벽까지 시험공부를 할 때면 늘 라디오도 켜져 있었다. 그 무렵엔 공부를 하다가도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눌러 나만의 앨범 만들기도 또 하나의 과제였다. 그렇게 120분짜리 테이프가 꽉 차면 늘어질 때까지 반복하여 듣곤 했다. 그 테이프 안에는 영국 록밴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도 들어 있었다. 어릴 때는 이 곡의 가사 의미도 모른 채 그냥 들었다. 그러다 가사 내용을 알게 된 후에는 외국에선 이런 내용으로 노래도 하는구나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정재민의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 소식과 더불어 수상작 제목을 보자 이렇듯 옛 추억도 함께 밀려왔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여러 면에서 흥미를 자극했다. 우선 작가 정재민이 현직 판사라는 점과 이 책의 주인공 역시 판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정재민 작가가 책에서 설정한 주인공 하지환은 20대 후판의 판사이다. 하지환이라는 주인공 이름이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책장에 꽂힌 <독도 인 더 헤이그>라는 정재민 작가의 전작에서 필명 역시 하지환이었다. 작가 본인의 필명을 책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만큼 하지환은 정재민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주인공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기든 아니든 이 책의 주인공은 작가의 전문성을 가장 잘 발휘해 줄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음으로 이 책의 소재는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건은 이렇다. 지환의 어머니는 다년간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으며 약을 복용해 왔고 그 부작용으로 위장병을 얻었으며 급기야 위암으로 발전돼 사망에 이른다. 사인은 위암이었을지 모르지만 원인 제공은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우연히 어머니의 병이 류마티스 관절염이 아니라 퇴행성관절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의사의 의료 과실이 아니라 그 지역 인구의 10%에 달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개인의 의료 사기였다. 주변에 이런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까 싶다가도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만 같은 사기행각이다.
이런 흥미요소들이 포진한 <보헤미안 랩소디>는 잘 읽히는 책이다. 그런데 내용의 전개 양상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지환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본격적으로 법정 소송 과정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재판은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으로 무장한 담당의사 우동규의 봉쇄에 가로막혀 허망하게 끝이 난다. 병원, 언론, 정치계, 법조계까지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지환을 비롯한 의료 사기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린다. 따라서 피해자 이들은 적절한 보상은커녕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 와중에 지환은 모자가정에서 자라며 갖게 된 내적 상처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정신분석을 받는데 이 과정이 오히려 이 책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진다.
지환과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지환의 정신분석 내용들에서 공감 가는 부분은 많다. 꿈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평소의 말과 행동이 알고 보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그의 감정 기저와 비슷한 점도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분석으로 본래의 나 자신을 찾는 것은 인생에 있어 무척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닌 감춰진 상처가 자신에게는 더 큰 독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줄기는 끝까지 작가가 잘 잡아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가까운 과거, 오래전 과거를 번갈아 오가는 속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의 멜로디는 계속 흐른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가졌던 의문이 비로소 풀리는 결말에서는 작가가 숨겨둔 깜짝 반전도 있어서 마지막까지 잃는 재미를 선사해 준다.
주인공이 젊지만 판사라는 법조계의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법으로 심판하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니 일반 시민이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갖가지 장애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작가는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따라서 읽는 내내 통쾌함 보다는 씁쓸함이 진하다. 하지만 작가 정재민의 작품에 대한 신뢰도는 한층 높여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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