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어나기 2초전 아녜스 르디그, 장소미 | 푸른숲 | 20140729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절대 두 손 들지 마라,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일 수도 있다.’ - 아랍 속담 -
얼마 전 모 신문에 실리기도 했던 아랍의 이 속담은 프랑스 작가 아녜스 르디그의 소설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을 집약하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의 순간들...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때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고통의 순간은 훨씬 짧게 지나고, 기적적인 희망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고 나니 다시 잠들기가 망설여지던 어느 밤, 산뜻한 표지와 책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읽다가 다시 잠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출근 걱정도 잊은 채 끝을 보고 나서야 읽기를 멈췄다. <기적이 일어나기 2초전>에 담긴 사람들의 ‘선함’, ‘온기’. ‘희망’, ‘사랑’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나 역시도 다음날까지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사랑했던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아들 제롬을 키우던 폴은 차가운 성격의 두 번째 아내를 만나 30년을 무미건조하게 살았다. 그러다 최근 두 번째 아내마저 이혼으로 결별하고, 현재는 장보기 초보의 50대 돌싱남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제롬’의 삶은 어떨까?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을 나이에 계모는 그에게도 냉담할 뿐이었고, 의사로 성장한 그가 사랑한 아내는 우울증으로 고통 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해 버렸다. 30대의 그에게 남은 건 억눌린 슬픔과 외로움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열여섯 살 때 술김에 저지른 하룻밤 불장난으로 미혼모가 된 스무 살의 슈퍼마켓 캐셔 줄리. 꿈도 희망도 없이 궁핍한 형편에도 오직 아들 뤼도빅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단한 일상과 직장의 스트레스를 참고 견딘 지 오래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 날 과일 무게도 잴 줄 모르는 남자 폴이 계산대에 사과를 내려놓으며 이들의 운명적 만남은 시작되었다. 줄리에게 왠지 모를 연민을 느낀 폴은 몇 가지 호의를 베풀고, 줄리는 낯선 50대 남자의 친절이 달갑기보다 경계하고 불편해 한다. 그러다 즉흥적으로 폴은 제롬과의 여행에 줄리와 그녀의 아들 뤼도빅을 초대하고 잘 알지도 못했던 네 사람의 여행이 시작됐다.
찌들었던 일상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윤택할지 몰라도 아늑하지 못한 결혼생활이 폴에게 공허함만 안겨줬고, 사람의 온기나 밝음은 잊고 지내왔다. 제롬 역시 매일 똑같은 환자들을 돌보며,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것 마냥 자책하느라 그 자신의 상처는 들여다 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이제 스무 살, 한창 꿈을 키워갈 나이에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줄리 또한 그녀와 아들의 암담한 미래가 답답할 따름이었다. 꼬마 뤼도빅 역시 보육시설에서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에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상처투성이의 네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웃음을 되찾아주고, 희망을 보여주는지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진한 감동이 저절로 밀려온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작가는 시간의 여유를 주고 서서히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 서두르지 않음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장치들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여행지에서의 달콤했던 휴식이 끝나갈 때쯤에는 줄리 못지않게 섭섭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폴의 말처럼 이들의 만남은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앞으로 그들의 삶은 행복으로 채워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인생은 늘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폴, 제롬, 줄리, 뤼도빅의 삶도 다시 웅덩이에 처참히 빠진다.
이 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인생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일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고 했듯, 계속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한 번 짐작조차 되지 않을 고통 속에 내던져진 이들이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 보여준다.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폴, 줄리, 제롬은 그들의 주변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상처를 돌보고 걱정하며 사랑으로 삶의 용기를 되찾아 나간다. 그들이 보여준 끈끈한 애정과 지지는 그 어느 가족들보다 탄탄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목처럼 기적과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매일 쏟아지는 책들 속에서 이런 책을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다 싶다. 놓치고 지나쳤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다 읽은 후에도 계속 생각나고 뭉클한 여운이 길게 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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