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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푸른바람꽃 2011. 12. 25. 22:32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이덕일 | 역사의아침 | 20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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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에 나는 문학동네에서 펴낸 <한중록>을 읽고 새로운 내용들에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일국의 세자를, 아니 그보다 자신의 아들을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뒤주에 가둬 말그대로 말려 죽인 임금 영조. 그가 얼마나 조선 경영에 능통했는지는 몰라도 아들을 죽인 아비라는 오명을 씻을 수는 없었고, 그의 기행으로 말미암아 정신상태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겠거니 미뤄 짐작했었다. 그런데 의외의 정황들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서 드러났다.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른 건 그의 정신병증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국혼이 정략에 의해 이뤄진다고는 하나 그래도 남편이고 장차 보위를 이을 왕세손의 아비인데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도세자에 대한 지어미로서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이 죽게된 이유에 대해 서술한 것을 살펴보면 사도세자는 종잡을 수 없는 성정과 소심함, 의대증이라는 강박증이 있었으며 영조와는 능행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한중록>을 읽고 쓴 서평에 "적어도 영조가 그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만큼은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남겨 놓았다. 아울러 <한중록>이 마치 진실인 양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성급한 판단이 역사를 얼마나 왜곡시키는 것인지 역사학자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구. 사도세자의 고백)>를 보며 여실히 깨달았다.

 

<한중록>을 검증할 필요도 없이 사실로 간주되는 이유는 이 기록의 저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혜경궁 홍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혜경궁 홍씨가 당연히 사도세자의 편에 서있는 사람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적일지는 몰라도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특히 자신의 친정 가문의 명운이 달린 문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이덕일은 <한중록>이 지닌 한게를 지적한다. 사건의 제3자가 아닌 사건의 이해 당사자라고도 할 수 있는 혜경궁 홍씨의 기록 인 <한중록>은 일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객관화 된 내용으로 판단한기는 어려우며, 과장과 왜곡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조실록', '정조실록', '어제장헌대왕지문' 등의 사료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들어 사도세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한 마디로 저자는 사도세자가 죽을만 해서 죽었다는 세간의 편협한 생각을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런 편견이 뿌리내리게 된 근원으로 <한중록>을 지목하며 <한중록>의 맹신을 문제시 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을 토대로 짐작해 보면 사도세자가 죽은 근본적인 이유는 기득권자였던 노론이 사도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모든 장애물들은 제거하고야 말았던 노론에게 세자라고해서 다를 까닭이 없었다. 절대권력자로 보이는 왕일지라도 신하된 자들이 그를 왕으로 선택, 이른바 택군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왕권국가에서 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귀하게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북벌을 꿈꾸고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희망하였다. 개혁을 위해서 보수세력과의 대립은 당연지사, 그러나 노론에게 사도세자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사도세자는 소론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으되, 왕이였던 영조조차 어찌하지 못하는데 소론의 신하들이 죽어진들 사도세자를 구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리라.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렇게 또 다른 가설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 가설 또한 진실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중록>을 진실이라 믿어온 사람들에게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비운의 삶을 살다간 그를 재조명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서로 소통하여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할 일부 학자들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리다고 단정지으며 상대에게 비난과 공격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쪽 분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이덕일 소장과 정병설 교수와의 논쟁은 이 책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런데 책의 후기도 아닌 들어가는 말부터 정 교수 보란듯이 구구절절 그의 의견을 논박하는 글이 30여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고 있어 마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덕일 소장의 입장에서는 정 교수의 말도 안되는 공격에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분노하였겠냐만 이런 성격의 글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라는 텍스트를 여타의 선입견 없이 처음 읽게 된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나는 이유 불문하고 책은 텍스트 그 자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 이런 논박의 글을 싣는 자체가 탐탁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책의 편집자와 저자가 쌍방 합의 하에 이런 글을 게재하기로 했다면 적어도 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접하고, 독자 나름의 생각과 판단이 가능해 지는 마치는 글 정도에 넣어야 했지 않나 싶다. 그랬더라면 이덕일 소장의 주장도 독자들의 더 큰 공감과 이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책과 관련한 논란들은 그러한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책을 만들던지, 그것이 안된다면 적어도 이 책을 벗어난 외적인 영역에서 논의되어져야 했다고 본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오해와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다가서고자 노력했던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점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라는 책이 지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으나,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담은 진솔한 서평임을 밝힙니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