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산책 시키는 남자
![]()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전민식 | 은행나무 | 20120322 평점 ![]() ![]() ![]() ![]() ![]()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20대의 나이에 번듯한 외모와 좋은 학벌, 컨설턴트라는 전문직업까지 성공가도를 달리던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달콤한 인생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산업 스파이였던 여자에게 홀려 회사의 기밀을 누출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죄로 한 순간에 빈털털이 백수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현대에서는 일명 '루저'라고 부른다. 패자. 그는 과연 누구와의 어떤 싸움에서 지고만 것일까? 올해 세계문학상은 주인공 '임도랑'을 비롯한 이 시대 '루저'들의 다양한 삶과 내면을 드러내 보인 전민식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가 차지했다.
세계문학상의 초창기 작품들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최근 3년간 수상작들을 꾸준히 읽어오고 있었다. 수상작들의 면면이 꽤 흥미롭고 작품도 재밌어서 올해의 수상작에 대한 기대도 컸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번 수상작은 특히나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라는 책에 대한 설명때문에라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저 살기 바빠서 인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사람 냄새'는 언제인지도 모를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세상에 이런 직업도 있을까 싶지만 개를 산책시키는 일은 미국에서 흔한 아르바이트라고 한다. 이 작품의 작가 전민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가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도 뉴욕타임즈에 실린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사진을 본 후라고 한다.
2008년 쯤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청년 실업이 심각해 지자 이 같은 신종 직업 내지 아르바이트들이 속속 생겨났고, 그 때의 미국과 지금의 한국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애완동물-요즘은 반려동물이란 말을 더 자주 듣게 되지만-의 산책에 고용된 이 현실은 주인공이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그에게 기회는 엉뚱하게도 특별한 '개'를 산책시키는 일에서 찾아오고 '도랑'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그는 다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작품 속에서는 '도랑' 뿐만 아니라 '삼손'과 '미향', '은주'가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가족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가족마저도 이제는 '역할 대행'으로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는 현실이 예사롭지 않다. 또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재혁'이나 저마다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몽몽 원장', '미라' 등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이 작품은 냉소 보다는 온기를 머금고 있는 듯 하다. 주인공 '도랑'은 평범치 못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게다가 사랑이라 믿었던 여자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후 배신 당한 그로서는 사람을 다시 믿고 의지하는 일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다시 쓰러진 그에게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워준 이들은 그의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비록 그들에게 돈과 권력은 없었지만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는 갖고 있었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담백한 문장들이 무척이나 잘 읽히는 소설이다. 한 마디로 가독성이 좋다는 말이다. 어엿한 작가로 등단하는 '꿈'을 향해 오랜 시간 준비하며 갈고 닦은 저자의 글은 매끄럽고 탄탄한다. 이렇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 그 자신도 우리 사회에서는 '루저'로 불렸을 지 모른다. 작가는 인텨뷰에서 "냉정하게 말하면 희망은 없지만, 살아내는 게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며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희망임을 역설했다. 벌써부터 이 작품은 영화 제의가 오가고 있다는데 스크린에서 만나기 힘들다면 브라운관을 통해서라도 꼭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빠르면 가을 쯤 출간 된다는 전민식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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