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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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햇살의 온기를 머금은 지붕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겨울날 아랫목에 앉아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슬레이트와 기왓장으로 만들어져 있던 친구네 집 지붕 위는 친구와의 은신처였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가끔 그 곳에 올라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이내 어둑해 지고 나면 지붕 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를 찾는 엄마들을 놀래켜 주려고 일부러 숨을 죽이고 골목 어귀를 지켜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기억을 여태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테헤란의 지붕>에 등장하는 파샤와 아메드가 아니었다면 내게 지붕에 얽힌 추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갔을 것이다.
<테헤란의 지붕>은 1973년 여름에서 1974년 겨울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배경으로 파샤라는 소년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이란 사회는 독재와 탄압으로 시민들을 억압하고 있었으며, 비밀경찰 사바크의 감시가 삼엄하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마지막 4학년 과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던 열일곱의 '파샤'와 '아메드'는 매일 파샤네 집 지붕에서 그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이란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그러나 파샤에게는 아메드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비밀이 있었는데, 그가 짝사랑하고 있는 이웃집 소녀 '자리'에 마음이었다. 파샤는 진심으로 자리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는 이미 그가 존경하고 따르는 대학생 '닥터'의 약혼녀였기때문에 차마 속내를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친한 아메드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아메드 역시 짝사랑 하고 있던 소녀 '파히메'가 있었는데 아메드와 파히메, 파샤와 자리는 그 해 여름 서로 어울리며 급격하게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달콤했던 그들의 여름은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끝이 나고, 네 사람도 혼란스런 나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평범한 소년으로 보였던 파샤에게 처음으로 '그것'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던 사람은 '닥터'였다. 본문에서 종종 등장했던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 파샤도 모르고 독자들도 모른다. 대신 짐작만 하고 있던 '그것'은 한 마디 정의할 수는 없어도 파샤의 반듯한 성품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련을 견디며 파샤와 아메드, 자리와 파히메는 모두 어른이 되어 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남들이 파샤에게서 발견한 '그것'을 파샤 스스로 찾아내게 된다.
“명예, 우정, 사랑,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는 것,
일신의 평안을 위해 눈 감고 귀 막지 않고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사는 것……
그 모든 걸 합쳐놓은 게 ‘그것’이죠, 그렇죠?” p. 394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이란은 내게 생소한 곳이었다. 가끔 영화에서 무슬림들이 등장해도 그들의 나라는 모두 중동의 어느 곳으로만 인식해 왔다. 그래서 <테헤란의 지붕>에 등장하는 1970년대 초 이란의 정국 상황은 책을 읽으며 인터넷을 뒤진 다음에야 대강 가늠할 수 있었다. 당시 이란의 모습은 최근에 읽었던 <적절한 균형>의 인도를 다시금 떠오르게 했고, 우리나라의 독재정권 시절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테헤란의 지붕>에는 비슷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있어서는 확연히 구별되는 유쾌함이 있었다. 작가는 1974년 겨울인 현재 시점을 잠깐 보여준 다음 1973년 여름이라는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짧게 보여지는 현재 속의 파샤는 뭔가 심각하고 고통스런 일을 겪은 듯 보인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의 과거를 차례대로 읽지 않는한 그가 겪은 끔찍한 일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파샤가 행복한 순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의 내용이 재밌어서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특별한 이야기 구성 방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1974년 겨울 현재로 제 흐름을 찾고 나서 부터는 긴장감이 너무 쉽게 풀어져 버려 아쉽기는 하다. 게다가 작가가 남겨놓은 마지막 반전도 실마리가 너무 많았던 나머지 금새 알아채고 말았다. 끝까지 그 반전이 반전으로서 제 역할을 다 했다면 더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말로 갈수록 이 이야기가 유쾌했던 전반부를 뒤로하고 절망적으로 끝날까봐 슬그머니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그런 독자들의 바람을 다행스럽게도 작가가 충족시켜줘서 고마웠다. <테헤란의 지붕>은 테헤란에 살았던 평범한 소년과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하였고, 테헤란 사람들에게 친근한 지붕 위를 그 이야기의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물, 평범한 장소가 주는 친숙함에 그들이 품고 있던 특별한 사랑과 우정, 신뢰와 신념 등이 더해져 이 책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하늘과 맞닿은 지붕 위에서는 지금도 테헤란의 소년, 소녀들은 꿈을 꾸고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하게 될 새로운 희망은 결국 이란이라는 나라가 가져야 할 희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품은 새로운 희망이 '파샤' 그 자체였던 것처럼 이란이 품은 희망도 그 나라의 청춘들일테니까. 시대는 다르지만 이란의 생각과 문화를 간직한 그들을 나는 <테헤란의 지붕>에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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