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떠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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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의 작품 중에 '완전한 사랑'이란 드라마가 있다.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와 그 남편의 사랑, 그리고 가족애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극 중에서 아내와 남편의 사랑은 시종일관 눈물겨운 순애보의 결정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드라마 속 남편의 모습은 죽을 병에 걸린 배우자를 둔 사람의 바람직한 롤 모델로 보였다. 그러나 그 드라마를 함께 봤던 엄마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드라마라서 저런 남편도 있는 것일 뿐,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 때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했지만, <사랑을 떠나가면>을 읽는 동안에는 엄마의 말을 실감했다.
유방암 말기인 아내 카르멘과 그녀의 남편 댄의 이야기라는 이 작품의 줄거리를 처음 봤을 때 난 서두에 언급했던 그 드라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당연히 드라마에서처럼 어느 부부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를 보게 되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최루성 멜로와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를 보며 엄마가 내내 말했던 '암투병을 함께 겪는 부부의 적나라한 현실'은 마치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드라마 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부가 암 진단을 받은 후 겪는 일들이 곧 현실 그 자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여자의 입장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이 떠나가면>은 저자 레이 클룬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체험 수기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정확하고 부가 설명까지 자세하다. 그런데 그런 지나친 솔직함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카르멘과 댄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지만, 남편 댄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만큼 심각한 바람둥이다. 댄의 설명으로는 그가 '고독공포증(고독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으로 충동적인 성적 욕구를 갖게 되는 심리 증상)'이기때문에 그의 외도도 병적 증상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 자신도 병인 것을 안다면 치료를 받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텐데 댄은 자신의 고독공포증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오히려 즐긴다. 댄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을 카르멘은 어떻게 참고 용서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카르멘이 암과 사투를 벌이는 그 순간에도 댄의 외도와 약물 복용, 음주 운전 등은 계속 됐고, 그러다 그에게도 한 때의 바람이 아닌 카르멘의 빈 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댄은 그녀와의 밀회를 카르멘과 암의 도피처로 삼는다. 이쯤 되자 댄에 대한 분노로 나는 그의 사랑이 가식적으로 느껴졌고, 카르멘이 안쓰러웠다.
책을 읽으며 내내 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외도를 하지 않을 때의 댄은 헌신적인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매일 그 모습을 유지하라고 강요한다면 댄의 인생까지 암에게 내주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댄이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는 댄도 환자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될 그의 상처도 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댄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남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주인공 댄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카르멘의 죽음을 지켜보며 죽음의 공포보다는 이별의 슬픔이 더 컸다. 그리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카르멘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암에 걸리는 순간 환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주도권을 암세포와 의사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런데 그 의사들은 권위적인 태도로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인생의 선택권을 되찾는 것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품에서 잘 보여준다. 문화적 격차와 가치관의 차이 등으로 <사랑이 떠나가면>을 편하게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간다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고 그것에 더욱 감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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