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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은교 - 내 안에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 너

by 푸른바람꽃 2010. 5. 13.

은교

저자 박범신  
출판사 문학동네   발간일 2010.04.06
책소개 네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다!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들여다본 박범신의 신...

 

3월 말 무렵,  잠깐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오는데 하늘에서는 때 아닌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머물다 오는 길이라서 눈이 반갑기는커녕 집으로 돌아갈 일부터 걱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이러다 잔뜩 심술이 난 지구에게 봄을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해마다 조금씩 길어지는 겨울과 빨리 오는 여름 사이에서 봄은 점점 제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결국 올해의 봄도 올 때는 더딘 걸음으로 늑장을 부리더니, 오기가 무섭게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안타까운 이별이 많았기에 더 슬프고 아쉬웠던 2010년의 봄... 그 봄을 떠나보내기가 못내 싫었던 어느 날에 나는 <은교>를 만났다. 그리고 첫 문장-'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p. 7)-을 읽자마자 다음 내용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으로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은교>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벚꽃나무 아래 서 있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이적요’가 회상하던 ‘은교’와의 첫 만남. 그 순간 그가 느꼈던 ‘관능’의 미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 모티브다. 이 ‘관능’을 나는 떨어지는 벚꽃들을 바라보며 느꼈다. 알알이 맺힌 순결한 분홍의 꽃봉오리들은 바람이 제 몸을 스치는 순간, 그 바람결에 온몸을 맡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구태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를 뿐이다. 자신을 잊고 오롯이 상대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이 감각의 마술, ‘관능’은 <은교> 속에 농밀하게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관능’의 모태는 ‘은교’였다.

 

일흔의 노시인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했던 열일곱의 소녀, 은교. 노시인이 내게 보여주고 들려주었던 ‘은교’는 환상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실상 ‘은교’는 길을 가다 스치는 수많은 여고생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적요’와 ‘서지우’에게는 남다른 그 ‘누구’였고, 그들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 ‘은교’는 더 이상 수많은 여고생 중 한 명이 아닌 ‘은교’ 그 자체가 되었다. 그녀는 그녀를 두고 두 남자가 벌이는 신경전을 알까? 두 남자를 대하는 그녀의 모호한 태도는 무슨 의미일까?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때로는 요부처럼 당돌한 그녀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은교‘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이 맹랑한 소녀를 마음에 담은 두 남자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은교’를 둘러싸고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의 전말은 두 남자의 일기라는 지극히 비밀스런 형식을 빌려 관계의 제3자인 ‘Q변호사’에 의해 공개된다. 무릇 일기란 무엇인가. 세상을 향한 고요 속의 외침이자, 내적 자아의 서툰 고백이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감성적으로 변한다는 ‘밤의 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인공들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이 내용들은 ‘일기’로 드러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타인의 일기를 통해 비밀을 알아간다는 것은 한 개인의 가장 깊은 곳을 몰래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관음의 장치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일기를 따라 읽음으로써 노시인과 그의 제자가 ‘은교’와 그들의 문학 '작품'에 품었던 애정, 욕망, 질투, 시기 등의 흔적들을 생생히 엿보게 된다. 그럼으로써 독자들도 자연히 주인공들의 시선을 따라 은밀해지고, 결과적으로 관음의 쾌락은 극대화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드러난 소재만 놓고 보면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금지된 사랑과 치정 살인사건을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전부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소설 <은교>는 제목의 주인인 소녀 ‘은교’를 참 많이도 닮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는 좀처럼 제 속을 내보이지 않던 그녀처럼 <은교>가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사건의 정황이 아닌 등장인물과의 심리적 합일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이적요’와 ‘서지우’, ‘은교’라는 세 인물은 이 작품에서만큼은 인간의 대표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보편적인 사람들의 본능적 욕망과 정서였다.

 

그러나 끝내 바닥까지 드러난 인간의 내면을 마주하게 되자,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런 치졸한 질투와 이율배반적인 감정들, 낯 뜨거운 욕망 따위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욕망은 억제하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고,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에 더 익숙해진 탓이다. 하지만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뒤늦게 부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아 버렸다. 내 안에도 단단히 빗장이 채워진 작은 방이 하나 숨어있었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은교>는 인간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적요’는 자기 파괴의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이미 빗장을 풀고 나와 버린 자신의 영혼을 다시는 그 좁은 곳에 가두기 싫어서 차라리 육신이란 감옥을 버리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은교> 속 ‘이적요’를 통해 나는 노년의 삶과 회한, 시간의 힘도 무력하게 만든 사랑과 욕망을 보았고, ‘서지우’에게서는 결코 닿지 못한 꿈에 대한 갈증과 허기를 느꼈다. 그리고 ‘은교’... 그 알 수 없는 아이는 끝까지 내게 곁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났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녀가 궁금하지 않다. 그녀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나는 그녀를 보고, 느끼며, 생각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봄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헤어짐은 곧 다시 만나기 위함이다. 하루가 멀어졌으니, 우리의 재회는 하루만큼 더 가까워졌다. 따라서 이 글을 끝으로 잠시 떠나보내게 될 세 사람에게도 작별의 인사는 무의미하다. 다시 만날 사람들과의 이별이니 그저 살다가 문득 떠오르면, 어딘가에 있을 ‘이적요’, ‘서지우’, ‘은교’에게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나 전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세월이 흘러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서로의 껍질 따위는 훌훌 벗어버리고, 흐르는 시간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을 우리의 순수한 알맹이만 조심스럽게 꺼내 보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