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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소설노동자가 내린 러시안 커피의 유혹!

by 푸른바람꽃 2009. 11. 15.

 

 

 

강렬한 붉은 색의 머플러를 하고, 한 손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노서아 가비'라는 제목보다 출간 즉시 영화화 결정,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라는 부분으로

나의 시선은 재빨리 옮겨 갔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김탁환이라는 저자의 이름도 보이고, 러시안 커피란 글자도 눈에 들어온다.

 

책을 읽지 않아도 알게된 노서아 가비의 정체!

그것은 러시안 커피였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커피의 추억  

 

이 책의 화자인 따냐가 처음 러시안 커피를 알게 된 것은 역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였다.

열 여섯의 소녀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처음 알게 된 커피의 강렬한 향기와 빛깔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

 

따냐처럼 나도 태어나 처음 커피를 만났던 순간을 잠시 추억해 보았다.

한참 동안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멈춘 때는 동네 유치원을 다니던 일곱 살 무렵이었다.

나는 따냐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지독한 고독의 향기를 처음 맡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액자를 만드는 가게를 하셨다.

그래서 가게에는 서예가 선생님들을 비롯해 그냥 지나는 손님, 아버지의 친구분들에서 동네 이웃사람들까지

손님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았다. 어린 내게는 가끔 마주치는 손님들이 과자 사먹으라며 쥐어주는 용돈벌이가

마냥 좋았던 때라 몇 번의 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내 손에 돈을 쥐어주는 손님들을 내심 반겼다.  

그리고 내가 손님들을 기다렸던 또 다른 이유는 커피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늘 음료수를 준비해 두셨다.

그러나 가끔 준비된 음료가 없거나, 좀 귀한 분이 오셨다 싶을 때는 근처 삼일로 다방에 커피를 주문하시곤 했다.

잠시 후 가게에 들어선 곱게 화장한 언니의 손에는 꽃무늬 보자기로 싸인 작은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고...

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부러 그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오늘은 커피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었었다.

그동안 커피를 시킬 때마다 아버지는 애들이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시며 절대 내게 커피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보자기를 풀어헤치면, 빨간 보온병과 몇 개의 커피잔, 네모난 각설탕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이미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다방 언니가 몰고온 고소한 커피 향기는 내 후각을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입맛까지 다시게 했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그런 내가 불쌍해 보였던지 손님들께 한 잔씩 돌아가고 남은 약간의 커피가 내게도 주어졌다.

아버지의 묵인 아래, 궁금해 마지 않았던 그 커피를 드디어 살짝 맛본 순간, 커피의 맛은 향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쌉싸름하고, 고소하며, 달큰하면서도 뒷맛은 텁텁한... 커피는 그 때까지 내가 맡아왔던 그 향기 그대로 였다.

 

 

처음 만나는 러시안 커피의 유혹

 

그러나 학수고대 하고 마셨던 것이 무색할 만큼 그 이후 나는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기간에만 요일별로 하니씩 마셨던 작은 캔커피가 전부였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던 탓인지

당시 커피의 각성효과 덕분에 한 캔만 마시면 졸음 걱정 없이 밤생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졸음 방지용으로 

대학 졸업 때까지 요긴하게 커피를 활용했었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가고,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잠시 쉬는 틈을 타 홀짝이던 커피가 늘어 갈수록

커피를 마셔도 잠 잘자고, 커피를 마셔도 더이상 심장이 두근대지 않았다. 이젠 친구들과 모이면 으레 찾게 되는

수많은 커피전문점에서 무수히 들이켜온 덕분에 커피는 너무 익숙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러시안 커피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추운 대륙에서 독주만큼이나 사랑받았을 것이 뜨거운 커피이지 않을까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화기 무렵, 처음 커피를 맛본 고종이 후에 아침 저녁으로 이를 즐겼음은 최근 무한도전에서도 잠시 언급됐기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 고종의 바리스타가 된 따냐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가 <노서아 가비>였다

 

월향, 안나, 은여우, 그리고 따냐...

그녀에게는 이름이 많다. 각각의 이름처럼 그녀의 모습도 고정돼 있지 않다.

그동안 보았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전형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깃털처럼 가볍고 대범한 여자 사기꾼으로 등장한 따냐는

진실해서도 안되고 정직해서도 안되며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안된다는 사기꾼들의 철칙에 걸맞게 그 진심을 알기 힘든 인물이다.

동업자이자 연인이고, 결코 용서가 안될 '이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의 커피 맛을 사랑하면 벗으로 대했던 '고종'은

또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물음표 투성이다. 그러다 보니 따냐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이야기 조차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따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고, <노서아 가비>에

빠져들게 하는 늪과 같았다.

 

 

쉼 없이 달려온 따냐의 삶과 커피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한 채 누명을 쓴 아비의 죽음과 풍비박산난 집안의 몰락으로 그녀는 러시아로 향한다.

그 곳에서 러시아의 숲을 팔아 넘기는 사기꾼이 되어, 자신의 무리까지 속여 넘기는 당돌함에 그녀의 성정을 엿 볼 수 있다.

더이상 러시아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바리스타가 되고, 다시 낯선 땅에서 카페 주인이 된다.

그녀의 이런 삶의 모습은 따옴표 하나 없이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달려온 <노서아 가비>와 닮았다. 그래서 일까?

한 자락씩 들려주는 따냐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 '따냐의 문학카페' 손님들처럼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따냐에서 러시안 커피, 그리고 <노서아 가비>로 이어지는 이 쉼 없는 이야기에 중독되어 한동안은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따냐를 떠올릴 것이다. 또한 바람처럼 자유로웠던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못내 그리워할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다시 조선을 떠날 때까지 따냐의 인생에는 음모와 사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익을 위해 모였다 흩어지는 인생, 그것은 비단 따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매일 속고 속이며, 각자의 인생이란 큰 판 돈을 건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점점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삭막한 곳으로 변해가는 지도 모르겠다.

따냐처럼 유쾌한 활극을 기대하기에는 이해타산에 따라 거대한 사기극에 발을 담근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이다.

 

"천하를 덮는 조롱이 등장한다 해도 그 조롱 너머로 날갯짓 하리라"던 따냐는 결국 그녀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로운 그녀가 '이반'과의 관계에서는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그것이 사랑일까 생각했지만 따냐라면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답은 의외로 고종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함께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는 이도 있고,

 함께 가기 싫은데도 딱 들러붙어 끝까지 가는 이도 있고."        <노서아 가비> 中 p.145

 

 

 

이 말을 곱씹으니 따냐와 이반, 그리고 고종의 관계가 좀 더 명쾌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소설가 김탁환이 내린 뜨거운  <노서아 가비>는 중독성이 강하다.

서둘러 리필을 청하고 싶을 정도니까...

 

그러나 이런 욕심은 그가 뽑아낼 다음 작품을 만날 때까지 잠시 미뤄두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따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