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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는 모래위를 걷는 개 - 특이한 제목의 특별한 이야기

by 푸른바람꽃 2009. 11. 15.

 

 

 

책을 열면 내용의 시작에 앞서 소리나는 모래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은 이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일부이면서, 또한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처음 보는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지만, 책의 제목만큼은 충분히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 나는 모래...그리고 그 위를 걷는 개... 설마하니 그 개가 주인공일 것 같지는  않았고,

결코 뭉쳐지지 않는 모래라는 단어의 이미지 때문일까? 어쩐지 외로움이 잔뜩 묻어있는 제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들은 모두 외톨이였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사회,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닌 다섯가지 이야기!

 

첫번째 이야기는 홈리스를 꿈꾸는 중년의 샐러리맨이 주인공이다.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도 그는 보이는 유령일 뿐이었고, 그 자신도 그런 삶에 갑갑함을 느낀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며, 씻고 싶을 때 씻는 홈리스는 그에게 자유의 표상과도 같았다.

작은 일탈로 시작했지만, 어짜피 그것은 그에게 진짜가 아닌 가짜의 삶이었다.

언제든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홈리스'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로 어쩌면 길 위에서 사는 홈리스들보다 집도 있고 직장도 있지만,

진정 마음 편히 쉴 곳은 하나도 없는 그가 진짜 홈리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 주변에도

겉으로는 멀쩡한 홈리스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집이라고 이름 붙인 그 곳에서 집의 의미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아이돌(그러기엔 나이가 좀 많은)소녀를 사랑하는 오타쿠 청년이 주인공이다.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은 한 마디로 비주류 아이돌이다. 펜들을 구름같이 몰고다니는 여느 아이돌과 달리

고작 팬미팅에 참석한 인원은 4명이 전부인, 그래서 연예인이 아니라 연외인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오타쿠 청년의 짝사랑은 진정 펜심(心)이란 이런 것!! 이라는 교훈이라도 안겨주려는 것처럼

늘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의 화려한 성공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다.

 

여기서 이 책의 묘미가 처음 등장했다.

 

첫번째 이야기만 읽고서는 알 수 없었던 등장인물들 간의 상호연관성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홈리스 체험에 나섰던

샐러리맨 아저씨가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오타쿠 청년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물질적, 정신적)을 아이돌님께 바치느라 피폐해진 모습으로 동네 편의점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그와 샐러리맨 아저씨는 운명적으로 만나고, 훗날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한다. 각각의 개성넘치는 이야기들이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뜻밖의 상황에서 마치 다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에게 바통 터치하듯 한 번씩은 마주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지금까지 읽어 왔던 옴니버스 구성의 소설 중에서 <소.나.개>의 구성과 이야기 전개방식이 단연 일품이다.

분리된 이야기들이 이처럼 긴밀하게 엮여서 일심동체를 이루듯 굴러가는 소설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 때서야

나는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 알고 보니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의 개그맨이자 연예인이었다. '게키단 히토리' 라는

예명으로 드라마와 쇼오락 프로그램 등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그가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일본 내에서도 큰 기대가

없었단다. 연예인이 자신의 인기에 힘 입어 이름만 빌려준 허울 좋은 책들이 일본에도 없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발간한 게키단 히토리의 <소.모.개>는 일본에서도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어 나가면서 충분히 이 책은 그럴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다섯 가지의 이야기들은 모두 작지만 의미있는 반전 하나씩을 숨겨 놓았다가

매번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슬며시 꺼내 보여준다. 그 순간 순식간에 <소.모.개>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세번째 이야기는 꿈이 없는 것이 부끄러워 카메라맨이 꿈이라 말하고 다니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등장인물 간에는 서로 연결고리가 있다. 그 중 이 소녀의 정체는 제일 처음 등장했던 샐러리맨 아저씨의 딸이다.

듣기 좋게 꾸며낸 꿈이라도 명색이 '꿈'인데 카메라 하나는 들고 사진찍는 시늉이라도 해야했던 그녀. 그러나 디카의

성능은 커녕 메모리카드가 뭔지도 잘 모르던 그녀의 무식함이 카메라 메모리를 고장내고, 졸지에 디카는 좀 비싼

일회용 카메라로 둔갑해 버린다.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의 장난과 배신,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연...여기서의 반전도 슬쩍 웃음짓게 한다.

 

네번째 이야기는 특이한 채무개념을 가지고 도박에 빠진 역무원이 주인공이다.

그의 논리를 빌리자면, 마음껏 현금 서비스를 받게 해주는 마법의 카드가 진 빚은 카드사에게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그 돈을 갚아나갈 미래의 나에게 진 것이니 결국 내 돈을 내가 쓰는 것이라 말한다.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황당하지만 굳이 틀렸다 할 수 없는 생각을 풀어낸 작가의

기발함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채무개념을 가진 그였으니, 그가 하는 도박의 논리 또한 확률 0%에 가까운 것이고

그의 빚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스스로도 빚을 갚으려는 의욕마저 상실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세번째 이야기의 소녀와 역무원이 승강장에서 마주친다.

상처받은 소녀는 금방이라도 철로에 뛰어들 것처럼 보이고, 정작 철로에 뛰어들 준비를 하던 역무원은

얼결에 소녀를 설득하며 주옥같은 말을 남긴다.

 

"그렇군. 나도 고민은 많아요. 하지만 말이지, 난 이렇게 생각해요.

인생은 도박이라고... 대학입시도 도박이고, 취업도 도박이고, 인간관계니, 연애니 하는 것도

모두 다 도박이거든. 모든 것에 다 이기고 지는 게 있어요. 하지만 고민은 결코 패배가 아니야.

고민은 결과가 아니라 아직 진행중인 과정이거든요."

 

"알겠어요? 대학입시 실패도, 일에서의 문제도, 그건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야.

결과는 자신 속에서 결정하는 거에요. 어떤 사소한 행복이라도 언젠가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게 결과라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노력한 결과. 나는 아직...

아가씨는 아직, 그 결과를 못 봤어요.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살아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거라고요."

 

소녀에게 해 주려던 위로와 충고의 말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과 같았고, 그의 인생은 또 한번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가장 진한 감동을 남기며, 마지막 다섯번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바통을 넘긴다.

 

마지막 이야기는 드디어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이다.

책의 맨 앞장에 적힌 그 글은 다시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고 마지막 이야기는 현재가 아닌

과거로부터 출발한다. 소녀가 소년을 만나고, 다시 세월이 흘러 소녀는 소년을 찾아 나선다.

재회한 기쁨도 소녀를 몰라보는 소년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이미 소년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물 같이 바람 같이 흘러간 시간들 속에서 두 사람의 이별을 앞에 두고 소녀가 다짐처럼 속삭였던 말...

헤어져도 그녀에게는 소년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는 그 말을 끝으로 먼 길을 돌아 현재의 자리에서

소녀는 다시 소년을 찾아냈다.    

 

<소.모.개>는 이렇게 총 다섯가지의 작은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마치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이런 형식의 소설을 나는 좋아하지만

잘 짜여진 옴니버스 소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무색할 만큼 게키단 히토리는 충분히 작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는 동시에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작은 양장본의 책을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버리게 하는 매력!

<소.모.개>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역자의 해설에서 게키단 히토리의 인생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예명인 게키단 히토리가 '1인 극단'을 의미하듯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했던 삼류개그맨 소년은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의 원제는 <음지에 양지에 핀다>이다.

 

[ 열심히 살아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사람들을

    그를 감싸 안고 싶었다. 나 또한 10대 시절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음지에도 꽃은 핀다.  - 게키단 히토리 -]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하찮은 사람이 없듯 하찮은 인생 또한 없다.

 

또한 고독에 몸부림치며 홀로 살아가는 우리가 옷깃 한 번 스치며 지나는 데에도 수천겁의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의미없는 만남도 없는 것 같다. <소.모.개>에서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만들어낸 기적같은 일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말이다.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져 외로이 굴러다니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서로 부딪히며 뭉쳐졌다 산산히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사각 사각 특유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그리고 그 모래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읽은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였다.

 

 

 

 

앞날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 그런건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 <소.모.개> 중 p1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