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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말기"

by 푸른바람꽃 2009. 11. 15.

 

 

 

길을 가다 예쁜 여자를 봤을 때 열에 아홉의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여자를 따라 시선이 이동한다.

찰라의 순간이겠지만, 곁에 함께 있는 연인의 존재조차 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이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도 고개가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자는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예쁜 여자를 봤을 때도 고개가 돌아간다. 마치 무릎을 치면 다리가 번쩍 들리는 것처럼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일종의 조건반사이지않을까 싶다.

 

예쁘고 잘생긴 것은 살아가는데 요긴한 무기가 된다. 인생의 출발선에서 그들은 이미 몇 십 미터쯤 앞서 있는 것만 같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때부터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길들여져 성장한다. 해마다 곳곳에서 예쁜 아기 콘테스트까지 벌어지는 이 판국에 일단 예쁜 외모는 지나가다가도 사탕 한 알 받아챙길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이 법칙은 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주목받아 왔고, 언제나 추함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 올지라도 추함이 아름다움을 추월하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누가보더라도 못생긴 여자를 평균 이상의 잘생긴 남자가 사랑한단다. 그저 호기심에 찝적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다. 

길에서 우연히 이런 부조화스러운(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만이 조화스럽다는 이 또한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가...) 커플을 만나면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여자가 돈이 많나봐!" 따위의 쓸데 없는 말을 뱉으며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보다 못 생긴 여자가 내 애인보다 잘생긴 사람을 끼고 지날 때의 질투심으로 그 여자를 돈 많은 여자로 포장한 뒤에야 위안이 되는 심리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잘생긴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고 있는 그녀의 낯빛에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할 지 모른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날 때의 자격지심. 그것은 비단 경제력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외모든 학벌이든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음 한 구석에 열등감이 꿈틀거리고, 특히나 그것이 모든 이의 눈에 바로 보이는 외모의 문제라면 이 자격지심이 때론 결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커플의 '있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못생긴게 뭐가 어때서, 사람은 마음이 중요한 거야"라는 성인군자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요한처럼 묻고 싶다.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느냐고...". 만일 내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미남과 부자가 좋은 당신(p.415)"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속 보이는 거짓말 같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속물같이 느껴지니 이런 곤란한 질문 따위는 "잠깐, 실례..."라는 말로 일단 피하고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것은 그가 미추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였기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가 잘생긴 아버지와 그저그런 어머니를 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잘난 외모' 강박증 같은 것이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멋드러진 외모가 상대에게 날리는 선방(역시 이 단어는 맞춤법에는 맞지 않겠지만 선빵이라 쓰고 읽어야 더 실감나는 말인 듯 하다)이라니!!! 작가의 이런 기발하고도 정확한 지적에 깜짝 놀라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성장한 주인공이 의식적으로 그 선방을 맞지 않기 위해  이성과 만날 때도 가드(guard)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결코 아버지,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 그리고 그의 남다른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그녀'와의 사랑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이렇게 읽고 나서도 이처럼 나는 자꾸만 그들의 사랑을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어디가 좋냐는 말에 "그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랑"을 나는 이 두사람에게 허락치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냥" 사랑할 수 없는 사이라는 틀에 갇힌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충실히 편승하며, 과거의 그런 아픔이 없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아이로 성장했다면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이에 대해 나도 <어쩔 수 없음>이라고 밖에 말 못하겠다.

   

이 책에도 <노서아가비>처럼 그 흔한 따옴표 하나 없다. 그저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문단이 문단의 꼬리를 물며 예고 없이 이야기가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책의 절반 이상을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뭐라 해야 좋을까? 밥을 먹는데 입에 넣자마자 삼켜버려 내가 뭘 먹었는지 무슨 맛이었는지 당췌 모르겠다는 기분. 혹은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지만 그 글자가 마치 총알처럼 그냥 뚫고 지나가버린 느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그랬다. 한참을 읽었는데 '잠깐, 방금 내가 뭘 읽은 거지?'하며 도돌이표가 수십개 붙어 있는 악보를 읽듯이 앞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마음에 남으면 남는대로 그냥 글자밖에 안 읽히면 또 그런대로 읽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참 이상한 책도 다 있군...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이 책도 참 묘하다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었지만, 약장수가 약을 팔기 위해 쉼 없이 떠드는 이야기 같이 정신없었던 요한의 말들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궤변처럼 들리는 그 말들도 자꾸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고기 같다. 대신 먹자마자 소화되는 고기는 아니었고, 턱이 조금 아플만큼 질겼다는 것이 내게는 조금 문제가 되었지만... 80년대를 살았던 20대들은 모두 저렇게 심각했던 것일까? 하긴 열아홉 스물을 지나던 주인공조차 내게는 너무 심각해 보였다.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정신 없을 나이에 그들의 대화는 늘 100분 토론을 방불케 했다. 한 남자의 연애상담이 저토록 심각하고 다양한 주제로 발전할 수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다. 주로 요한이 주인공 '나'를 가르치는 입장이었으나 요한의 영향으로 '나'는 점차 세상에 눈을 뜨고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게 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이렇듯 비현실적인 로맨스가 깃든 '나'의 성장소설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 우리학교에는 예쁜 아이들이 참 많았었다. 그 중에서 예쁜데 공부까지 잘하는 소위 '김태희'과의 친구들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쁜 애들도 예쁜 애들이지만, 그 당시 권력의 핵심은 아무래도 '성적'이었다. 예쁜 것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으니 각 반의 성적 1등이 누군지는 알아도 미모 1등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고3 때, 나는 동급생 중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방송국을 들락거리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서울이라면 몰라도 지방에서는 극히 드문 경우여서 순식간에 아이들은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남들은 어떻게든 1점이라도 올려서 좋은 대학에 가고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누구는 예쁜 거 하나만으로 화려한 직업의 세계(그것도 잘만 하면 대박치는)에 입문할 수 있다니 부러움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궁금했던 그 주인공은 소문이 돌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 매점에서 볼 수 있었다. 나와 똑같은 하얀색 고급 숙녀화를 구겨신고 매점에서 빵을 사는 그 애는 지금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낯선 얼굴이었다. 지난 3년간 존재감도 없었던 과거를 뒤로하고, 혹시 연예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그 애는 학교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자세히 보니 예쁘긴 예쁘다며 수근거렸다. 뒤에서는 저 정도 예쁜 애들은 널렸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p.186

 

이 구절을 읽으며 지금은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 아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연예인이 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 때 아이들은 그 친구를 주목이나 했을까? 그리고 지금처럼 대한민국 남자들의 이상형으로 손꼽히게 됐을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그녀를 더욱 빛나게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인이 극구 성형한 적이 없다고 하니 그 때보다 놀랄만큼 예뻐진 이유를 나는 요한의 말처럼 '터무니없이 밝은 빛'의 효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서 그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사적으로 알건 모르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완곡한 표현이고, 더 솔직히 말하면 싫어한다에 가깝다. 미에 대한 질투는 이 정도다. 나보다 못 생긴 여자를 편하게 생각하고, 예쁜 애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 저편에는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다. 게다가 평범한 인생이 예쁜 것만으로 성공(시집을 잘 갔거나 연예인이 됐거나)을 거머쥘 때는 싫어하다 못해 뒷담화까지 늘어 놓으며 안티팬을 자처한다. 그래서 가끔 연예인들의 안티팬들이 알고보면 그들의 동창생들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미녀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에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부자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도 일맥상통한 것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p.315

 

외모로 채점당하는 '여자'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더니, 외모보다 능력이 우선인 '남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나 보다.

어쨌든 외모에 대한 질투와 시샘은 부나 권력, 학벌, 집안 등 여느 다른 조건에 대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차원이 다른 듯 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서 '나'와 요한이 늘어놓았던 사회 부조리에 대한 열변이나 '나'와 '그녀'의 플라토닉 러브보다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는 부분에 가장 집중했고, '외모학'이란 학문을 연구해 봐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녀'가 보낸 마지막 장문의 편지 한 통으로 이 책의 모든 것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두 가지의 다른 결말.  

만일 보라빛 결말을 끝내 읽지 않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만큼이나 이미 지나와 버린 길에 대한 후회도 살짝 들었다. 그것은 책의 본문과 연결된 첫 번째 결말이 되려 꿈만 같고, 이어서 보여진 두 번째 결말이 더욱 현실 같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차라리 읽지 말 걸 그랬나... 하며 쓸데 없는 생각에 잠겼다. 결코 그럴 수 없었으면서 말이다. 보랏빛 책장에 박힌 '요한'이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안부가 누구보다 궁금했으면서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p.361

 

영화 <우리집에 왜 왔니>에서 등장했던 대사와 너무도 닮은 구절이다.

누가 먼저 생각해낸 말이건 진실은 사랑 이꼴 기적이란 것!

 

심각한 이야기들 속에 결론은 너무 달콤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으나, 세상만사 "좋은 게 좋은거니까..."라고 요한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자의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 하지 말기"란 것이 실상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결국에는 이루고 싶은 소망으로 그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책을 덮으며 문득 '강마에'가 그리워졌다.

멜로디만 알고 있던 귀에 익은 그 곡의 정체가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음을 클래식에 무지했던 내게 처음 가르쳐준 그가... 그리고 요한처럼 시니컬 했던 그의 독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