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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 평범한 삶을 박탈당한 나이지리아 소녀의 생

by 푸른바람꽃 2009. 11. 15.

 

 

 

"그날, 그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어."

 

 

책의 뒷표지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는 그날, 그곳, 그런 일을 상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책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을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기가 두렵기도 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은 결국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게 하고 마니까... 내 가장 깊은 곳에 있을 그 바닥도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새라와 앤드루, 리틀 비가 처음 만났던 그 곳에서 닥쳐왔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난민수용소에서 2년간 갇혀 지냈던 리틀 비가 출소할 때부터다.

열 여섯살의 나이지리아 소녀가 어쩌다 난민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리틀 비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리틀 비는 성급한 독자보다 인내심이 있었고, 어서 네 이야기를 들려달라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가 겪어야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마치 다른 사람의 사연인냥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삼촌이라 부르던 아저씨 등 리틀 비의 삶은 단조롭고 평화로웠다. 뒤처진 문명의 거리만큼 그들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그런 평범한 삶이 곧 행복이었던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했던 마을이 한 순간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한 것은 유전이 개발되면서 부터다. 자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가족들을 뒤로하고 언니와 탈출한 리틀 비는 마침 나이지리아 남부 해변으로 여행을 왔던 앤드루와 새라 부부를 만난다. 

 

"살려주세요!". 두 소녀의 이 외침은 진실로 그들의 목숨을 앤드루와 새라의 손에 맡기고 의지하고자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앤드루와 새라에게는 "괜찮으시면 저희 좀 도와주세요" 정도로 들렸고, 멀쩡한 아이들의 목숨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앗아가는 야만적인 행위 따위가 벌어질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부부는 그들이 있는 그곳이 어딘지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상상 그 이상의 잔혹함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던 곳이 바로 그들이 서 있던 그 자리였음을... 

 

그 일로 인해 앤드루, 새라, 리틀 비는 이전의 그들이 될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너버린 그들의 인생은 난파선처럼 정처없이 떠돌기만 할 뿐이었다. 세 사람은 각자의 마음 속에 각자의 죄책감을 껴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 일을 잊지 못했다. 그것이 곧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죄책감은 이 책의 저자 크리스 클리브의 전작인 <인센디어리>에서도 중요한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인센디어리>에서 여주인공은 불륜에 빠져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느라 남편과 아들만 축구 경기장에 보냈다. 그 현장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 그녀는 한 순간에 두 사람을 잃는다. 무엇보다 아들에 대한 상실감과 죄책감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결국 자살까지 결심하지만 그녀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잉태되었음을 알게 되고 다시 삶의 희망을 갖는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혼자만 살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러므로 리틀 비가 느꼈던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인센디어리>의 여주인공이 느낀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유사하다(단, 리틀 비는 인센디어리의 그녀와 달리 비극의 순간 함께 있었다.). 반면 새라와 앤드루가 느꼈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이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외면해야 했던 두 소녀. 눈 한 번 질끈 감고 돌아서는 것이 두 소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생면부지의 이국 소녀들을 위해 그들의 목숨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목숨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였다 할지라도 그것을 스스럼 없이 내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결국 앤드루가 소녀들의 위험을 외면하려 할 때 그들을 위협했던 우두머리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언젠가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일어나 당신이 손가락 이상의 것을 잃어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p.185)

 

앤드루도 이미 그 점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테지만, 그 이상의 것을 잃는다 해도 당장 그와 부인의 안전이 더 값지게 느껴졌을 것이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 <10억>에서도 등장했던 "사람은 다 똑같애. 겁에 질려 살아간단말이야..."란 대사처럼 앤드루는 영웅이 아니라 평범함 사람이었을 뿐이므로 충분히 현실적인 앤드루의 생각과 행동이 이해됐다.

 

그러나 새라는 달랐다.

사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공감할 수 없었던 대목이 바로 새라가 남편 앤드루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부분이었다.

남편은 처음 보는 소녀들로 인해 악당들에게 위협을 받으며 손가락 하나를 내어 줘야할 판인데, 아내인 새라는 주저하는 남편을 향해서

 

"앤드루, 당신은 이 일을 해야 해요." (p.185)

"그냥 손가락 한 개일 뿐이야." (p.185)

"앤드루. 그냥 손가락이야. 그럼 우린 다시 걸어서 돌아갈 거야." (p.185)

"최소한 무언가를 해냈다는 건 알게 될거야." (p.186)

"내가 함께 있을게.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p.186)  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다.

 

아무리 남편에 대한 감정이 식었기로서니 그래도 아이의 아빠이고, 한 때라도 사랑한다 믿었던 사람인데 그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설지언정 울고 불며 말려야 정상인 사람이 '아내'이지 않은가?! 그러나 정의감에 넘치던 새라는 남편의 안위보다 모두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숭고한 결단으로 남편의 희생을 묵인하다 못해 지지한다. 더 나아가 결국 남편이 못한 일을 단숨에 그녀가 몸소 실행하는 놀라운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 순간 만큼은 새라가 평범한 책 속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성인(聖人)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어쨌든 새라 덕분에 앤드루, 새라, 리틀 비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 일로 리틀 비는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을 견뎌야 했고, 두 소녀가 죽은 줄 알았던 앤드루와 새라는 충분히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살아남은 자의 고통스런 2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만나서 풀어야 했을 매듭을 풀기 위해 다시 만나게 됐다. 이어서 리틀 비가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차례로 듣게 되는 순간 한 쪽으로 기울어졌던 시소가 비로소 균형을 이룬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것이 비극의 균형이라서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만난 새라와 리틀 비는 안으로 곪아들었던 상처를 다시 헤집는다.

이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스런 과정이었지만, 이 고통을 견뎌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새라와 리틀 비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웠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라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극한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목격했다.

 

리틀 비의 운명에는 평범과 행복의 양이 남들보다 턱없이 적은 것만 같다.

'모든 행복은 최대의 욕망 위에서 만들어 진다.(p.128)'는 작가의 생각이 맞다면 리틀 비의 욕망은 작은 평범함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복도 그렇게 짧았던 것인가 보다. 결말에 이르러 나이지리아 소녀에게 잠시 주어졌던 평범함과 행복함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듯 빠져나가고 만다. 그래서 분명 책의 마지막장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끝>이란 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이 리틀 비와 나의 한 가닥 희망이 되었다. 부디 그녀가 무사하기를... 그렇게 빌고 또 빌며 애써 나 혼자 살아남은 것만은 아니길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