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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 현대문학에서 다시 찾은 고전의 맛!

by 푸른바람꽃 2009. 11. 28.
지은이
출판사
문학동네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얼마 전 사촌 언니가 몸을 풀었다. 

첫 애가 아들이니 둘째는 예쁜 공주였으면 좋겠다던 바람대로 언니는 언니를 쏙 빼닮은 딸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임신 기간 중에도 그렇고, 출산 후에도 언니는 몹시 힘들어 했다. 첫 애를 낳고 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면서 언니의 몸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품에 안은 언니의 표정은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당당했고, 얼굴에서도 마치 광채가 나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사촌 형부까지 그 날만큼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갖 태어난 꼬마 아가씨의 '미모'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그냥 눈살을 찌푸린 것 같은데 형부는 자꾸만 방금 윙크하는 거 봤냐며 놀라워 했다. 이렇듯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기적 중 가장 놀랍고 기쁜 일이다.

 

보통의 임신과 출산도 이토록 행복한데, 결혼한 지 23년만에 첫 아이를 갖게 된 부부의 기쁨은 오죽 했으랴.

하지만 이 책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의 주인공이자 23년만에 애아범이 될 공생원의 마음은 기쁨도 잠시, 마나님의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볼 때마다 그의 시름도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태기가 없자 친구 손에 이끌려 동네 의원을 찾은 공생원은 그 곳에서 "생원님이 문젭니다. 마나님 탓하실 것 없지요." (p.30) 란 말과 함께 아이는 포기하고 마나님께나 잘하란 소리를 듣고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떡하니 마나님이 애를 가졌으니, 공생원으로서는 기뻐서 춤을 춰야할 지 슬퍼서 울어야 할 지 모를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의원이 의료사고까지 내고 도망간 마당에 그의 진단조차 이제 믿을 수 없게 됐다. 그 때부터 마나님의 뱃속 아기와 함께 공생원이 품은 의심의 씨앗도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내 아이인가, 아닌가? 내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김진규 작가는 공생원이 아니라 '꽁'생원이라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심약한 주인공의 280일을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나님의 임신 기간이었던 280일 동안 그는 마나님의 눈치를 살피고, 그가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용의자들과 일일이 접촉을 시도하며 증거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증거란 것을 찾는다 해도 공생원의 성격상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이는데, 그는 왜 그토록 증거와 범인 색출에 매달렸던 걸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공생원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결과, 얼핏 짐작가는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외도의 증거를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님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나님과 모종의 접촉이 있는 사람들 중, 가랑이 사이가 불룩한 종자들은 하나도 빼지 않는다"(p.165)는 어설픈 수사 원칙까지 세워놓고 예외를 두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공생원은 여덟명의 용의자들을 만날 때마다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스스로 용의선상에 올랐던 인물들을 하나씩 지워 나간다.

 

나는 공생원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박현욱 작가의 <아내가 결혼했다>에 등장했던 덕훈이다.  
덕훈과 공생원 둘다 잘난 마나님을 둔 탓에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심했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 공생원은 용의자들의 머릿수만 많았지 속 빈 강정과 같았지만, 덕훈의 아내는 대놓고 두 집 살림을 했다. 게다가 임신을 하고 나서도 아이의 친아버지는 끝내 밝히지 않고 출산을 감행해 덕훈의 속을 끓였다. 결국 공생원의 마나님 최씨와 덕훈의 아내 인아는 마치 사전 모의라도 한 듯, 아이의 친부가 누군지 닥달하는 남편들을 향해 당당히 외친다.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도 아닌 '내' 아이라고!!

딩~동~댕 ♬ 두 남자는 어이없겠지만 이 말만은  한 치의 거짓도 없고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진실이다.

 

언젠가 남자와 여자가 외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내용에 따르면 남자들의 경우 아내의 '육체적 외도'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는 반면, 여자들의 경우 남편의 '정신적 외도'만큼은 용서할 수 없단다. 솔직히 외도라는 것 자체가 어떤 경우이건 부부라면 쉽게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나마 한 번은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한계가 이렇게 극과 극일 줄은 몰랐다. 그 중에서도 남자가 아내의 '육체적 외도'에 더 민감한 이유는 아내의 임신과 출산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덕훈과 공생원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그들의 심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흥미진진한 내용을 김진규 작가는 조선시대의 생생한 풍물묘사와 다양한 인물들로 풀어낸다. 주인공 공생원 뿐만 아니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의 면면이 모두 특색있으며, 그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도 제각각이라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상을 보다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 사용된 시대상을 나타내는 단어들로 인해 이 책은 현대문학이지만 마치 고전소설을 읽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을 그저 '공생원전'이라 불러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옛말들 중 작가가 본문에서 슬쩍 설명해 주는 말들도 있지만, 간혹  짧은 어휘력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도 등장하기 때문에 주석이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끝내 몰라도 상관없을 이야기'라는 작가의 상냥한 배려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그 후 이야기까지 풍문으로 전해들은 것만 같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다들 무탈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싱긋 미소 짓게 되었다. 놀면서 써 내려간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는데, 이 책으로 처음 만난 김진규 작가의 필력은 새롭고 또 놀랍다. 늦깎이 신인 소설가이지만, 그만큼 깊은 감성과 연륜이 느껴지는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에 앞서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자 그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달을 먹다>도 하루 빨리 읽고 싶어졌다. <달을 먹다> 역시 시대 배경은 이 책과 비슷한 조선시대 영정조 때라지만, 그 내용은 치명적인 사랑이야기라니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