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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2 - 의생에서 의사로, 소의(小醫)에서 대의(大醫)로!!

by 푸른바람꽃 2009. 11. 19.

 

 

 

 

<제중원 1>에 이어 계속된 '황정'의 파란만장한 삶이 정점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모두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의 출신성분이었다. 지금도 경제적 격차가 곧 신분인 사회인데, 개화기라 신분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손치더라도 '백정'은 예외였다.

천하디 천한, 그래서 사람의 이름에 짐승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그들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간 '황정'이 제중원에서 얼마나 성실하고, 심성이 착하며, 무엇보다 능력있는 의생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백정은 백정일 뿐이라는 사실이 결국 '황정'을 옭아매고, 다 잊은 줄 알았던 백정 '소근개'의 삶으로 그를 내동댕이 치고 만다.

 

거기다 백정 '소근개'의 삶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그가 '소근개' 시절 저질렀던 밀도살이란 죄와 함께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그의 안위는 돌보지 않았던 탓으로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다.

 

이러한 거듭된 '황정'의 위기와 극복은 <제중원 1>의 말미에서 이미 예상 했던 바였다. 그러나 그 전개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작품의 재미를 반감시킨 면도 없지 않다. 또한 갈등이 사라진 자리에는 탄탄한 사료에 기초한 조선 근대 의학사를 풀어놓은 것만 같은 내용이 대신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황정'이다. 그러나 내용이 좀 더 탄탄한 기반 위에 바로 서기 위해서 작가가 중요시한 사실에 가까운 사료들 뿐 아니라 주인공에 버금갔던 두 인물 '백도양'과 '유석란'에 대한 배려도 필요했다고 본다.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서 '백도양'이 서술자인 부분도 있고 '유석란이'서술자인 부분도 있다. 그나마 '백도양'의 경우에는 악역에 충실하기 위해 제법 내면 심리를 그린 부분이 있으나, '유석란'의 경우 그런 부분조차 극히 드물다. '유석란'의 진심을 알지 못해 애닳아 하는 것은 '백도양'과 '황정'뿐만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설정한 '석란'은 총기있고, 슬기로우며, 심성이 곱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주인공에 그친다. 모던걸이 되고자 했던 그녀를 그 과정은 대부분 생략한 채 후다닥 의사로 만들어 놓고 그녀를 신여성으로 포장하고 있다.

 

어설픈 멜로 삼각관계는 결과적으로 드라마에 써먹기 위한 방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멜로가 이 책의 중심은 아니지만, 무시하고 지나칠만 하면 뜬금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질투와 서로의 애정 확인은 책의 내용 전체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럴 바에 처음부터 신분을 초월한 진한 사랑을 그려주던지, 아니면 순수한 동료애와 우정을 담백하게 그리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웠던 점은 '백도양'이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어릴 적 병인양요로 인해 애꿎은 어머니가 집에서 내쳐진 뒤 '도양'은 겉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속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인물이다. 예닐곱살 아이나 할 법한 '질투'와 '시기', '독점욕' 등이 그의 내면에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황정'에 대한 열등감의 근원은 '의학'과 '석란'이 두 가지이지만, 그것이 복잡한 인간 내면에서 누구나 가질 법한 보편적인 감정으로 보여지지 않고 유아기적 감정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누가봐도 완벽한 사람의 이면에 상처 받기 쉬운 '아이'의 모습이 숨어 있다는 것!

그것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백도양'의 모습이라면 그가 홀로 자신의 감정과 씨름하고 있지 않을 때만이라도 보다 대인배 같은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줬다면 양면성이 더 부각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백도양'의 '황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아버지의 죽음이 '황정'의 잘못이라 믿고 있기도 하지만...)은 끝내 '백도양'이 인간적인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악인으로 남게 한다.

 

요즘은 악역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인 미움만 받던 일차원적 존재가 아니다.

악인이지만, 처음부터 악인이지 않았던 악인! 그것이 더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나는 드라마 <태양의 여자>에서 실감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선과 악이 공존하는 악인이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나쁜 짓을 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사람... 비록 책에서 '백도양'에게는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실력을 자만하는 속 좁은 남자로 그려진 '백도양'이 '석란'의 존재만큼이나 아쉽다. 따라서 드라마에서라도 그가 보다 발전적이고 인간적인 악역으로 그려지길 바란다.

 

원작을 먼저 읽은 뒤라 내년에 보게 될 드라마의 재미마저 반감되진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와 달리 드라마는 호흡이 긴 작품이라서 책만큼이나 깊이 있는 내용 전개가 가능하다. 게다가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는 책 속의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태어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백정의 사내가 의사가 되었다는 흥미로운 소재였고, 조선 개화기 때의 모습과 휠체어, 간호원 등의 유래까지 덤으로 알려준다. 역사 왜곡이 아닌 사실의 역사에 충실한 내용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의 생각이 실존 인물과 사료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제법 정확한 조선의 서양 의학에 대한 역사를 가르쳐 줬다. 쉽고 빠르게 읽혀지는 책이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인물 간의 관계를 깊게 다루지 못했으며 사건의 단편적인 나열이 마치 드라마 매회의 에피소드를 보는 것 같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