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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 어긋난 사랑이 남긴 이별 그리고 후회

by 푸른바람꽃 2009. 12. 5.

체실 비치에서

저자 이언 매큐언  역자 우달임  원저자 Mcewan, Ian  
출판사 문학동네   발간일 2008.03.25
책소개 '어톤먼트' 원작자 이언 매큐언의 최신작! 타임스 선정 2007년 올해의 책! 영화 '어톤먼트'...

이언 매큐언.

이 작가는 그 이름이 갖는 특유의 무게감이 있다.

'작가들의 작가'로도 불리지만, 그가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 <속죄>를 통해서일 것이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도 <속죄>였고, 공교롭게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체실 비치에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속죄>라는 책이 전해준 이언 매큐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치밀함'이었다.

내용의 구성도 구성이지만, 특히나 인물의 내외면적 묘사는 지금껏 내가 보아온 동서양의 작가를 통틀어 그의 치밀함을 따를 자가 없다. 마치 사진을 찍어 돋보기로 들여다 보는 것처럼 자세한 묘사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구석의 먼지까지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이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 그의 작품을 굳이 찾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 책 좀 읽는다는 이에게서 <체실 비치에서>에 대해 듣게 됐고, 이 책을 만났다.

 

1960년대 영국,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떠난 신혼부부를 주인공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신혼 첫날밤에 대한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동상이몽을 그리고 있다. 신혼여행에서의 백미는 첫날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문화에 개방적인 요즘일지라도 첫날밤은 부부로서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서약을 마치고 맞이하는 그 나름의 신성하고 의미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플로렌스에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첫날밤은 건너뛰고 싶은 순간이었고, 첫경험 역시 영원히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성적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은 그녀 나름의 불쾌한 과거 어느 기억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이러한 성적 거부감을 에드워드에게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것이 그녀가 범한 가장 큰 실수였다. 지금이야 성 담론이  개방적이지만, 1960년대 영국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한 플로렌스가  이런 근심을 약혼자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고백을 가로 막았다. 그래도 부부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그녀는 에드워드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최소한 그의 사랑을 믿었다면 말이다. 같은 여자로서 플로렌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던 만큼 그녀의 실수와 그릇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의 참담함도 컸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생각하면 플로렌스만큼이나 가련하다. 그는 그저 플로렌스를 많이 사랑했고, 드디어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는 기대와 상상에 들떠 있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1년 간 교제하면서도 서로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 이토록 잔인한 비극의 시작이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플로렌스의 행동이 에드워드에게는 오히려 적극적인 유혹으로 느껴졌고 이런 오해가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첫날밤의 상처를 남기고야 말았다.

 

그녀의 뒤늦은 고백에 그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또한 이어서 듣게된 그녀의 말도 안되는 제안에 그의 기분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미처 알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그녀의 고백에 끝내 분노한다. 그것은 플로렌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이 지독히 끔찍한 것은 에드워드 혼자만이 아니었다. 플로렌스도 이 사태의 가해자가 돼버린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는 에드워드가 야속했다. 그리고 그 때, 플로렌스는 두 사람의 문제가  단순히 첫날밤의 불발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p.175

 

생각해 보면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무수히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순간의 선택이 우연과 필연으로 두 사람을 서로에게 인도했고, 이 과정은 첫날밤의 순간과 교차하며 지금가지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어린시절부터 지금에 이르는 두 사람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선 순식간에 어긋나 버린 인연이 허무하다. 이 허무감은 두 사람의 과거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 반면, 현재의 순간 특히 몰아치듯 진행된 두 사람의 마지막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기 때문에 더한 것 같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그에게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197

 

<속죄>에서도 그렇고 <체실 비치에서>도 이언 매큐언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주인공들의 절절한 후회를 그리고 있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의  마지막 구절처럼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좌우한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도 그들이 선택한 길로 인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빈 자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를 떠나 서로가 사랑했던 감정의 깊이에 비해 다분히 충동적이고 성급했던 두 사람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이 기나긴 여운으로 남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