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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 스물 넷, 그녀들의 비틀거리는 자화상

by 푸른바람꽃 2009. 12. 7.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저자 김민서  
출판사 휴먼앤북스   발간일 2009.04.13
책소개 '제5회 세계문학상 최종후보작' 우리 시대 이십대 여성들의 초상을 만나다! 이십대 여성 작가가 그...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중간에 덮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자는 오기와 함께 이미 책에 소비된 나의 경제적, 시간적 본전 생각때문에 쉽게 책을 덮지는 못한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권의 1/4 정도를 읽었을 즈음... 내가 이 책을 작파하지 않은 이유 역시 이 때문이었다.

그만큼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의 시작은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는게 오히려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지 계산기를 두드리게 했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의 도입부는 사치, 낭비, 허영, 쾌락으로 점철된 압구정 파티걸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렇게 놀아본 적도 없고, 놀만한 여건도 안됐던 내가 보기에는 '아... 저렇게 놀면서 걱정없이 사는 애들도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그 나이가 되도록 십원 어치의 노동도 해 본 적 없고,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고민은 전무한 아이들에게서 어떤 공감대도 형성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런 애들이 "나도 사는게 힘들어요~"라며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내게는 철 없는 여동생의 배 부른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난 가끔... 내가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힘들어 하거나 위로받을 자격을 박탈당한 것 같다고 생각해."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  p.172

 

책에서도 등장하는 '민희'의 이 말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흥청망청 쓰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스물 넷에 대한 질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 넷이란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것이 엊그제 같지만, 벌써 그 땐 그랬지라는 유행가 가사를 읊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는 그 때의 나와는 참 많이 다른(감히 내가 그들을 틀렸다고 하진 못한다...) 스물 넷 동갑내기 여자아이들(내 눈에는 아직 성인이기 보다 애들로 보이는...)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회인으로 내쳐지면서 겪게 되는 사춘기적 방황과 갈등 등을 그리고 있다.

 

비록 그 아이들의 휘황찬란한 일상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그들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스물 넷이란 점은 내가 그들을 조금 더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책 속의 '유민'이 학교의 졸업과 취업 사이의 공백기로 인해 느끼게 된 소속감의 부재와 꿈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그 당시 나의 느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유치원을 다녔던 일곱 살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한다고 비난 받을지언정 정규 교육과정에 길들여져 있던 내가  대학이란 방목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렴풋이 '누가 밥을 떠먹여 주던 편한 세상의 종말'을 예감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지나 버린 4년. 쥐뿔도 준비해 놓은 것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졸업하는 배짱을 부렸던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청년 실업',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이 세 가지였다. 

 

'졸업하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란 근거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정체불명의 낙관주의는 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의 민희, 수진, 혜지, 그리고 주인공 유민도 그랬다. 단지 그녀들은 든든한 경제력을 가진 '부모님'이라는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었단 점이 나와 크게 다를 뿐.(결론적으론 넷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음이 밝혀지지만....)

 

네 명 중 '유민'은 '돈오점수' 사상을 몸소 보여주는 것처럼 숙취로 깬 어느날 아침, 자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고민도 시작은 나처럼 소속감의 부재로 인한 불안함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싶은 데 붙이고 설 곳이 이 세상에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안절부절 못했던 심정. 그 때 마침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취업의 기회를 마다하기에는 막차를 놓쳐 영영 인적 없는 곳에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을 것이다.

 

초조한 자와 여유로운 자의 차이는 현재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  p.220

 

나와 '유민'은 스스로의 삶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불안해 했던 것일까?

삶을 얼마나 사랑하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에서 등장했던 위 구절에 공감하면서도 자꾸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초조한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고, 급히 먹은 밥은 체한다.

 

"그런데 꼭 보면, 그 배고픈 사람들일수록 급한 대로 아무거나 먹었다가 체해서 괴로워해.

결국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얼굴로 다시 먹었던 거 토해내고 입맛에 맞는 거 찾아다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더라고. 난 나쁜 일이라곤 생각 안 해.

입맛에 맞는 음식이 결국 비싼 음식이라는건 좀 탈이지만."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어도... 결국 토해내는 사람도 있었요."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  p. 255     

 

그녀들의 말을 빌리면, 나는 급한 대로 먹은 밥치고는 내 입맛에 맞는 밥을 골라잡은 덕분에 몇 년간 같은 밥만 먹어왔다.

입맛에 맞는 음식이었지만, 꾸역 꾸역 먹는 것이 괴로워 결국 토해냈고... 다음에는 심기일전하여 '비싼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그 때는 결국 입맛에 맞지 않다며 토해내고 말았다. 이러다 보니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신기루 같은 '꿈'이었다.

 

꿈이야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도전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전에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 방해요소부터 점검했다.

점검 결과는 늘 같았다. 도전 불가!

나의 꿈은 화려한 이미지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이미지를 현실로 만들기엔 겁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구체적인 장래희망조차 정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데 대한 변명이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 p. 244

 

아직도 꿈을 찾고 있다는 게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불시에 누군가가 이런 정곡을 찌르는 말로 나의 안일한 꿈사냥을 지적할까봐 늘 두려웠다.

꿈을 찾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일 뿐, 사실은 꿈을 이루어 나가는 것에 대한 고단함을 먼저 생각해 왔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서른살은 해탈의 나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도 알고, 남자도 알고, 세상 이치도 알고. 그래서 불합리한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마음 안가는 일도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   p.128 

 

내가 생각했던 서른살도 '유민'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앞서 말한 신기루 같던 꿈이 서른에는 손에 잡힐 듯한 꿈 정도로 다가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서른살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서른살이 알람시계는 아니다"는 말에 더 공감한다.

 

난 너희가 잘될까봐 무서웠어.

그 순간 깨달았다. ... 내 마음 한구석은 이미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바로 이것이 무서웠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가 갈 수 없는 세상으로 화려하게 비상하는 것이.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 p. 37

 

베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친구 사이일지라도 나보다 더 잘 된 친구... 특히 인생의 무임승차 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친구에게 진심어린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솔직하게 고백하는 기분이었고,

 

내 또래 여자들은 '엄마 말'에 평생을 기대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엄마 말은 늘 안정적이다. 현명하기도 하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하다가도 성공의 결정적인 묘약을 숨기는 계산적인 주변 사람들과는 다르다.

엄마는 성공의 묘약의 제조법의 원본까지 자식에게 모조리 넘겨준다.

오로지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맹목적인 바람하에.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  p.270

 

엄마의 말이 곧 인생의 밤길을 비추는 등대 같았음을, 그리고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의지하고 살아왔는지 절감했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며 참고 읽었던 책치고는 이렇게 많은 것들이 가벼운 말로 무겁게 담겨 있는 책이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였다.

그래서 칙릿이라고 분류하는 것보다 스물넷의 성장소설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생에서 맞이하게 되는 몇 번의 과도기에 여자 나이 스물 네다섯도 포함되어 있다.

그 나이에 읽는다면 그녀들의 화려한 일상은 접어두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느끼는 충격과 갈등, 절친 사이라서 아닌척 감추어 왔던 여자의 질투, 취업과 시집 사이에서 취집의 유혹과 욕망 등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서둘러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2권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야기가 갑자기 무거워지고, 결국에는 '유민'이 그녀의 삶을 바꿔보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계기 자체가 너무 극적으로 연출된 느낌이다. 따라서 굳이 그런 극약 처방을 내려야 했냐고 작가에게 되묻고 싶고, 이런 과한 설정이 '유민'과 독자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기만 하다. 그러므로 보다 개연성 있는 사건과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시작이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유민'이 그녀의 블랙 미니드레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그 순간까지 참고 읽기를 바란다.

그럼 최소한 나의 고민이 결국 '우리'의 고민이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