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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의 루머의 루머 - "그녀에게 미안합니다."

by 푸른바람꽃 2009. 12. 3.
지은이
출판사
내인생의책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작년 가을... 대한민국의 국민 여배우라 불리던 그녀가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 기차에 몸을 싣고 회사로 갔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아침 시간은 늘 분주하게 쫓기듯 움직이느라 여유있게 신문을 읽는 다거나, 뉴스를 보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기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회사에 가서 업무를 시작하려 할 때서야 나는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짓말 같은 죽음을 믿지 못해서 소식을 전해준 사람만 애꿎은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다.

'오늘 만우절도 아닌데, 다들 왜그래...' 아니길 바라며 인터넷을 열었건만, 이미 세상은 온통 그녀의 죽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왜... 왜... 그렇지만 왜!!!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마치 알고 지내던 지인의 죽음처럼 내게는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와 하루 종일 마음이 한 뼘쯤 붕 떠있었던 것도 같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사건은 끊이질 않았고, 그녀가 세상을 등 질만큼 시달렸던 온갖 루머들 역시 잠잠해질 기미가 안보였다. 설상가상 그녀의 유골함 도난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는 그녀의 처지가 한없이 애처로웠다. 벌써 1주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난 가끔 그녀가 공백기를 갖고 있는 중이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이렇게 뜬금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한 권의 책때문이다.

이국의 작가가 마치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미리 알고 써내려간 것처럼 책 속의 사건은 그녀를 떠오르게 했고, 그 내용과 의미심장한 말들 역시 마치 그녀의 마음과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클레이 젠슨은 어느 날 소포 하나를 받는다.

발신인도 없는 신발 상자를 받아들고, 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받게될 충격과 놀라움에 비하면 그 정도의 혼란스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자 속에는 일곱개의 녹음 테이프가 담겨 있었다. 1부터 13까지 앞 뒷면에 순서대로 숫자가 적힌 테이프를 재생시키자 흘러나온 것은 가수의 노래가 아닌 2주전 자살한 '해나 베이커'의 음성이었다.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 해왔던 클레이지만, 죽은 그녀의 음성이 생생히 담긴 테이프를 듣게 됐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게다가 그 테이프의 내용은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하나씩 지목하는 리스트였다.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차례대로 이 테이프를 받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자신의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이 테이프를 반드시 전달해야만 한다. 만일 이 규칙을 어길 시에는 이 테이프의 복사본이 누군가에 의해 학교나 지역 신문사, 방송국 등으로 보내지게 되어 있다고 해나는 친절히 알려준다. 그렇게 1번에서 13번까지 등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테이프들이 무사히 전달되어야 이 미션이 완료되는 것이었다.

 

불과 책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도 여기까지의 내용을 알게 되자, 다음 내용이 저절로 궁금해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클레이와 함께 숫자 1이 적힌 테이프의 A면부터 죽은 해나의 고백을 듣는다. 클레이처럼 왜 그녀가 그렇게 죽었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모든 것은 장난처럼 퍼뜨린 루머로 시작됐다.

낯선 도시로 이사오는 바람에 전학을 왔던 해나는 모든 것이 어색했고, 단지 마음 붙일 곳을 필요했다. 

혼자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되고, 복도에서 서성거릴 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면 충분했다. 그러나 짐작컨데 그녀는 이미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도 루머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듯했다. 책에 묘사된 해나는 눈길을 끄는 외모를 가졌고, 한창 이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으니 당연히 학교에서도 해나는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던 아이들에게 해나는 좋은 안주거리에 불과했다. 그녀와 키스 한 번 한 것이 전부인데, 마치 대단한 일이라고 있었던 것처럼 과장하고 부풀려서 친구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던 한 녀석때문에 전학온 학교에서 마저도 해나는 루머의 주인공이 됐다.

 

테이프 속에서 해나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한다.

 

그래. 뭘 듣고 싶니?

워낙 버전이 많아서, 어떤 게 제일 인기있는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가장 인기 없는게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진실 버전이야.

너희들도 잊지 말아야 할 진실.

 

사람들은 진실보다 가십에 열광하고, 삼삼오오 모였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는 주제로 연예인들의 루머를 끄집어 낸다. "누가 봤다더라, 확실한 사람에게 들었다더라... "는 말로 시작하며 제법 신빙성 있는 말처럼 들리도록 가장하지만, 실상 말의 끝맺음은 항상 내가 들었다거나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더라"는 일명 카더라 통신에서 나온 진위가 불분명한 이야기들뿐이다.

 

그러나 루머를 듣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이나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루머가 얼마나 자극적이고 놀라운 것인가'이다. 그렇게 나도 누군가의 루머를 재미삼아 듣고, 의미없이 전하며 또 다른 가해자가 되고 있음을 망각했었다.

 

자의든 타의든 해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을 테이프에서 한 명씩 만날 때마다 외롭고 힘들었을 해나가 가여웠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도움이 필요했지만...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들때문에 그럴수록 마음의 문을 닫고 더욱 더 자기 안으로만 침체되어 갔던 해나. 그래서 결국 '이건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왜 살아야하는가... '라는 비극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해나를 그 끝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녀의 주변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루머들이었다.

 

해나가 곁에 있었다면 한 대 때려서라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을 난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미스런 소문에 휩싸인 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뻔히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면서도 인생을 자포자기 하듯 자신의 소중한 일부를 내던진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밑바닥까지 추락해야만 스스로 생을 끝낼 수 있었다는 해나의 변명도 용납되지 않았다.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그 마음을 아무도 보듬어주지 못한 것은 모두의 잘못이지만, 그렇게 삶을 끝낼 용기가 있었다면 한 번만 더 주변 사람을 믿어보는 용기도 냈어야 했다. 해나에게는 분명 그런 사람이 곁에 있었음에도 자신으로 인해 혹시 그도 루머에 휩싸일까봐 지레 겁을 먹고 밀어내고야 만다.

 

테이프 여섯개하고도 반을 듣는 동안 의미없는 루머에 침묵과 동조로 가담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관심 갖지 않았던 '진실'에 대해 나 역시 무심했음을 반성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그것이 느껴졌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그 혹은 그녀를 불러 세워서 오늘 저녁이나 함께 하자며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작은 초대가 누군가에게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미안합니다"

책의 띠지 한 가운데 크게 새겨진 이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