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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 모어 - 트와일라잇의 미투 상품

by 푸른바람꽃 2009. 12. 29.

에버모어

저자 앨리슨 노엘  역자 김경순  원저자 Noel, Alyson  
출판사 북폴리오   발간일 2009.12.15
책소개 숨겨진 비밀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에버모어』는 영원한 삶을 사는 남자 데이먼과 환생을 거...

 

한 번 본 영화는 어지간해선 두 번 보지 않는 편이지만, 내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는 영화들도 몇 편 있다. 그 중 하나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바이센테니얼 맨'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가끔은 불로장생에 대해 상상해 보곤 했었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삶이 있다면 그것도 나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이센테니얼 맨'을 보고 나서는 그러한 삶을 과연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항상 홀로 남겨진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입장에 처하면, 그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능하면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을 꿈꾸며 생명 연장을 위해 애쓴다. 그리고 이 책 <에버모어>에도 그런 불사자들이 등장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가족들-아빠, 엄마, 여동생 라일리-을 모두 잃고, 혼자 삶아 남은 에버. 분명 사고 당시 에버 역시 죽음을 경험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에게는 초능력이 생겼다. 죽은 사람의 영혼과 사람들의 에너지 빛이라 할 수 있는 '오라'를 볼 수 있게 됐으며, 원치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피부 접촉만으로 그 사람의 지난 경험과 생각을 동시에 알 수 있다. 에버는 자신의 고집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동시에 난데없이 생긴 초능력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에버는 이 모든 고통이 자신에게 내려진 벌로 여기며 감내하고 있었다.

 

더이상 예쁘고 활발했던 10대 소녀 에버는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날 그 사고 현장에서 그녀는 가족과 함께 죽었다. 지금 숨 쉬고, 밥 먹고, 학교에 다니는 에버는 스스로를 벌하면서 오직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예쁜 금발은 후드 티셔츠의 모자 속에 감추고, 볼품 없이 초라한 복장으로 자신을 숨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지 않도록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다른 사람의 오라가 보기 싫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주변에 이런 괴짜 친구가 있다면 아마도 왕따 1순위일 것이다. 그나마 에버에게 다행한 일은 이상한 모습의 자신을 친구로 받아준 마일스와 헤이븐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죽은 여동생 라일리의 영혼이 병실에 누워있을 때부터 거의 매일 그녀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 유일한 기쁨이다. 그러던 어느날, 멋진 외모와 재력을 겸비한 데이먼이 전학을 오고 에버는 그에게 무작정 끌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데이먼의 오라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의 생각이나 마음도 엿볼 수 없다는 점이 에버를 편안하게 해 준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며, 데이먼과 에버 두 사람과 또 한 명의 여자 드리나까지 얽히게 된 사연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고 한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아픔이 무엇인지 저자는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책에서 에버의 심경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그러나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은 잘 표현해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에버의 감정 상태에 너무 몰입한 그 외의 것들에는 너무 무심해 보인다. 마치 책 속의 주인공 에버처럼 말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 책의 주인공들이 당연히 성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열 일곱, 열 여덟의 청소년들이다. 불사자라는 주제의 무게와 불멸의 사랑을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의 주인공들이라 생각되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또한 주인공들의 초능력은 너무 익숙한 것들이었다. 특히 상대를 스치기만 해도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영원히 늙거나 죽지 않는 다는 것,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 등은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마케팅 용어 중에 미투(me too)상품이란 것이 있다. '나도 똑같이'라는 뜻의 미투란 의미 그대로 1위 브랜드나 스타 브랜드를 모방해 그 브랜드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만든 제품을 두고 미투 상품이라 말한다. <에버모어>를 읽으며 내내 트와일라잇 생각이 떠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에버모어>는 이 책만의 독자적인 불멸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 대신 트와일라잇과 흡사한 설정들을 가미한 미국의 10대 청소년 소설로만 느껴진다. 한 마디로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독자들을 겨냥해 쓰여진 트와일라잇 류의 판타지 소설이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바와 너무 어긋나 버려서 그런지 두꺼운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리 6권의 에버모어 시리즈 중 시작인 1권이라고 하지만 총 456쪽의 분량 중 270쪽에 다다랐을 때야 겨우 데이먼의 꼬리가 밟히고, 다시 370쪽에 이르러야 에버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이렇다 보니 책의 상당 부분이 지루한 전주곡 같았다. 

 

이 책처럼 시리즈의 책들을 읽을 때 나는 각각의 책에서 보여주는 독자적인 사건 전개와 이야기를 매우 중시한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 시리즈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왔지만 각각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의 내용은 다른 이야기를 위한 프롤로그나 에필로그가 아닌 각각의 이야기 형식을 취하며 그 나름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 일관성과 독립성이 모두 확보되어 있어야 시리즈물이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에버모어>는 시리즈의 일관성까지는 아직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야기의 독립성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약하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위한 456쪽짜리 장편 프롤로그를 읽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책 <에버모어>만의 재미와 감동이 부족해서 결국 다음에 이어질 책에 대한 기대감 마저 앗아가 버린 느낌... 그런데도 이 책이 미국에서는 꽤 잘 나간 듯 보이는 띠지의 홍보문구를 보면서 나는 그것이 트와일라잇의 후광효과로 생각될 뿐이었다. 최근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밌었던 <헝거게임> 시리즈를 출간한 북폴리오의 책이라 내심 기대가 큰 작품이었는데, <에버모어>만큼은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어서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