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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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가 1년간 중국 심천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친구가 머물 당시 몇 번이나 중국에 한 번 다녀가라고 했었지만, 번번히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중국 여행은 가지 못했다. 아쉬운대로 그 친구가 들려준 중국과 중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심천과 이웃한 홍콩과 마카오의 이야기는 내가 가지 못한 나라에 대한 어떤 환상과 이미지로 각인된 채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중국 보다는 홍콩과 마카오, 이 두 곳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홍콩과 마카오의 경우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동서양의 문화가 묘하게 혼재된 곳이라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한 나라 혹은 도시 안에서 이색적인 두 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직접 탐방해 보고, 또한 친구가 극찬한 마카오의 에그타르트도 직접 맛보고 싶다. <피아노 교사>는 바로 이 두 곳을 무대로 전쟁 전후 세 남녀 - 윌, 트루디, 클레어 - 의 사랑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
2차대전의 피바람이 홍콩에 불어 닥치기 직전, 윌과 트루디는 처음 만났다. 영국인이었던 윌과 포르투갈인과 중국인 사이의 혼혈이었던 트루디. 서로에게 낯선 존재였던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졌고, 서로를 탐닉하며 연일 파티의 유희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가 바라본 윌과 트루디의 사랑은 고작 이 정도라고 밖에 말 못하겠다. 진중한 사랑은 이 두사람에게 애시당초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불처럼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사는 트루디를 감히 누가 소유할 수 있었을까? 또한 윌도 누군가를 구속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가 순식간에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다. 잠시 윌과 트루디는 은신처에 숨어 지내지만, 그 시간도 그리 길지 못했다. 홍콩을 점령한 일본인들은 외국인들만 색출하여 별도의 수용시설에 감금하고 학대하는데 그 속에 윌도 포함돼 있었다. 전쟁은 사람을 본능에 충실하도록 만들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못할 짓이 없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였다.
<피아노 교사>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전개한다. 1941년의 홍콩과 1952년의 홍콩을 번갈아 보여주고 두 시간에 공존하는 인물 윌을 중심으로 그를 사랑한 두 여자 트루디와 클레어를 등장시킨다. 전쟁 전부터 전쟁 당시의 상황은 윌과 트루디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10년 후의 홍콩에서 다시 만난 윌의 곁에는 트루디 대신 클레어가 있다. 전쟁은 윌의 인생에서 트루디를 앗아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궁금증에 시달린다. 윌과 트루디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1952년의 윌은 왜 그렇게 달라진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중반 이후부터는 책장을 넘기는 속도도 저절로 빨라진다. 이쯤 되자 난 윌과 트루디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클레어가 살고있는 1952년으로 넘어가야 하는 구성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읽은 내용에선 생생하게 살아있던 트루디를 1952년에서는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싫었고, 게다가 클레어라는 인물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클레어는 영국을 벗어나기 위해 나이든 남자와의 결혼까지 감행했다. 클레어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 그녀는 원래 모험심이 충만한 여성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윌은 지루한 결혼생활과 남편 마틴을 잊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고, 금새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로켓의 피아노 교사 일을 하는 동안 저지른 클레어의 상습 절도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탈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순간도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고 이리 저리 도망만 다니는 클레어... 클레어는 자신의 변화가 윌을 만났기 때문이라 여기지만, 윌은 이미 클레어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윌은 이전의 클레어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불륜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
상스럽거나 혹은 냉소적이거나 혹은 현명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람.
그래서 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p.117)
클레어에 비해 트루디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서 조차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국적인 전갈, 트루디니까... 사교계의 남성들과 일본인들마저도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윌이 그토록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까지도. 시대를 교차하며 등장하는 이 극과 극의 두 여성은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고 있다. 이상적 삶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가 되어야 했던 트루디와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지만 뒤늦게 이상적 삶을 갈구하는 클레어. 이 두 여성이 서로를 만났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지만, 책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952년의 클레어는 윌과의 위험한 만남을 지속하면서 점점 트루디라는 여자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아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윌과 트루디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쟁의 혼란 속에 어떤 놀라운 비밀들이 숨겨져 있었는지 알게 된 클레어는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또한 윌과의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어디론가 도피하려고만 했던 클레어가 결국 내면까지 성숙하게 되는 과정은이 책의 결말부에 녹아 있다.
이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은 단순한 깨달음이다. 일단 저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그녀는 거리 풍경 안으로 녹아들고, 거리의 리듬에 흡수되어 어렵지 않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p.470)
모든 것을 바꿔버린 전쟁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신의 원칙과 양심을 우선했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이적행위에 동참을 거부한다. 그 결과가 어떨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남자는 모른척 함으로써 사랑하는 여자를 방치했다. 결국양심과 도덕, 원칙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던 윌의 짐까지 트루디는 대신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났다. 트루디... 트루디... 트루디...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그녀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윌과 함께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가 떠났던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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