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설월화 살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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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가가 형사 시리즈'다.
그의 작품은 '가가 교이치로'와 함께 성장,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가가'는 그의 작품의 상징이 됐다. 현재까지 총 7권의 시리즈물이 나와 있고, <졸업>은 그 시리즈의 시작이다. 아직 형사가 되기 전, 대학 졸업반인 '가가'와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놀랍게도 1986년에 발표됐다고 한다. 1986년작이면 무려 20여년도 더 지난 작품이란건데 읽는 동안 전혀 시대에 뒤쳐진 작품이라거나 촌스러운 트릭이라 생각되지 않아서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형사가 된 '가가'의 모습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졸업>에서 전설 속의 그를 처음 만났다. 형사인 아버지때문에 어머니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가가'.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부재 속에 성장한 그에게는 모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그것이 대학 졸업을 앞둔 '가가'의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가'는 타고난 사건 해결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형사보다 교사의 길을 걷고자 한다. 그러나 고교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가가와 함께 해 온 여섯 명의 친구들 중 두 명의 여학생이 사망하게 되자 '가가'는 친한 친구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직접 진실을 찾아 나선다.
살인 사건을 추리하기 전의 '가가'는 검도를 잘하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흩어진 사건의 단서를 퍼즐 조각 맞추듯 하나씩 제 자리에 끼워 맞추고, 사건의 앞과 뒤를 연결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 형사 그 자체다.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 이면에 숨어있던 그의 천부적 재능은 앞으로 '가가 교이치로'가 뛰어난 형사로 거듭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가가'가 사건의 수수께끼를 모두 해결하고 범인을 알고나서 보인 행동에서는 그의 따뜻한 인간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형사 '가가 교이치로'를 만나기 전이지만, <졸업>에서의 '가가 교이치로' 역시 매우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 없다.
가가 시리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보통 형사인 '가가'를 먼저 만나고 나서 뒤늦게 <졸업>에서의 풋풋한 청년 '가가'를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베테랑 형사가 된 '가가'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재미를 안겨 주는 작품이 <졸업>일 것이고, 나처럼 '가가'와 첫 대면하는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그가 어떻게 형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 <졸업>이다. 고로 시리즈의 순서와 관계없이 <졸업>은 '가가'의 탄생이라는 그 자체로 의미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내용은 작품의 부제인 '설월화'의 정체였다. '설월화'는 두 번째 살인사건의 중심에 놓여있던 '화월 의식' 혹은 '설월화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다도 문화다. 몸소 체험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 같은데, 본문의 내용과 참고 그림만으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설월화'의 룰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사건의 추리 자체를 따라갈 수 없으므로 몇 번 반복학습을 해서라도 이 '설월화'의 원리를 꿰뚫고 있어야 책을 더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다. 이 밖에도 '가가'가 몸담고 있는 검도부의 이야기도 <졸업>의 주요 소재로 등장해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고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가가'와 '사토코'가 친구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애쓰고 있던 그 때, 고교시절 다도부 은사님이자 '설월화 의식'을 주관 했던 미나미사와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다.
"언제라도 진실이라는 건 볼품없는 것이야. 그건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직 진실만을 밝히려고 혈안이 된 제자에게 던진 선생님의 이 의미심장했던 말은 아마도 '가가'가 앞으로 형사로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를 딜레마에 빠트릴 것 같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아무리 볼품 없는 진실이더라도 거짓울 거짓인 채 남겨두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가가'는 끝까지 진실을 쫓을 것이고, 드러난 진실 앞에 인간적인 절망과 고뇌를 느껴야 할 지 모른다. 이런 딜레마는 일본의 만화 '명탐정 코난' 시리즈에서도 자주 등장했었고, 죽은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연을 가진 범인들때문에 속 시원히 드러난 진실의 통쾌함 보다는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졸업>은 이러한 '진실' 규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남은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을 때는 이 부분도 주목해서 읽으려고 한다.
"10명이면 10명 모두 납득하는 살인 동기가 아니라, '뭐야? 이런 걸로 사람을 죽여?'하는 추리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한 히가시노 게이고! 이런 범상치 않은 창작 의도가 결국 그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해 주었고, 1985년 데뷔 이래 수많은 작품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 <졸업>으로 '가가 형사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으니 다음에 읽게 될 <잠자는 숲>에 대한 기대도 크다. 대학을 졸업한 '가가'의 모습도 궁금하지만, 그가 프로포즈 했었던 '사토코'와의 관계에 어떤 진전은 없었는지 더 알고 싶어서라도 서둘러 '가가 형사 시리즈 2'를 만나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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