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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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책을 읽고 나면 꼬박 꼬박 서평 쓰기를 미루지 않았다. 서평을 쓰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과 같아서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하면 쓰기 싫어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은 읽은 직후에 가장 생생하기 때문에 가급적 다음 책을 읽기 전 서평 쓰기를 마무리 해 왔다. 그런데 <달을 먹다>는 예외였다. 서평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으면서도 블로그의 흰 여백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진규 작가의 글독(毒)에 중독된 듯 속이 꽉 막힌 기분에 사로잡혀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서평 쓰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책을 읽으며 마음을 좀 정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책마저 다 읽은 지금, 겨우 <달을 먹다>의 서평을 다시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적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든 끄적여서 토해내고 나면 정체불명의 이 답답한 체증이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최근 김진규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을 흥미롭게 읽고 그녀의 글솜씨에 흠뻑 빠져 들었다. 전형적인 소설들과는 차별화된 느낌. 그것이 김진규 작가의 글에서 발견한 매력이었다. 따라서 이 작가의 데뷔작이자 첫 번재 소설 <달을 먹다>도 몹시 궁금했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과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남녀간의 치명적 사랑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소개글은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꼭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는 성미가 급한 편이라 얼마 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양반과 중인, 노비 이렇게 신분 계급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혼인과 불륜 관계로 얽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는 이야기다. 이들의 관계를 3대에 걸쳐 풀어 놓았으며, 아홉명의 화자가 등장해 각자의 시선으로 이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홉명의 화자가 문제였다. 서로 얽히고설킨 이 아홉명의 인물이 같은 사건마저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맨 처음 등장했던 서술자 '묘연'의 시점에서는 갖난쟁이였던 '희우'가 나중에는 성인이 되어 '묘연'이 묘사한 사건을 다시 '희우' 자신의 시각으로 서술하는 식이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 구조는 아홉명 모두에게 해당된다. 같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느끼고 생각하는 바는 제각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름은 낯익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헷갈려 앞 페이지를 들춰보기 바쁘다. 이것이 이 책을 어렵고 복잡하게 하는 이유이자, 한편으로는 이 책이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흥미를 자극했던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정체는 좁게 보면 아홉명의 등장인물 중 두 사람의 근친상간을 뜻한다. 하지만, 넓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사랑인 줄 모르고 스스로 인생을 망쳐버린 다른 몇몇의 주인공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속마음을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시대였으니 남녀 사이에서도 서로 진심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 좋아도 좋다는 내색 한 번 못 해 보고 어긋나 버린 인연은 비극이 따로 없다. 맨 마지막 수상자 인터뷰 글에서 밝혀진 이 작품의 원제가 '내심(內心)'인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를 괴롭힌 것은 바꿔친 제목 '달을 먹다'의 의미였다. 분명 '내심' 보다 더 좋은 제목이라 여겼으니 새로운 제목을 달고 책이 나왔을텐데 도무지 이 바뀐 제목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을 뿐더러 책의 표지도 부조화의 극치였다. 내가 이 책의 서평 쓰기를 주저한 이유 중에는 바로 이 '달을 먹다'란 제목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탓도 있었다.
혼자 여러날 궁리도 해 보고, 다른 사람의 서평도 살펴봤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심'이란 원제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는 내용만 있을 뿐 '달을 먹다'의 의미를 짐작케 하는 힌트조차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낸 아래의 기사문을 읽고 겨우 '달을 먹다'의 의문을 풀게 됐다.
‘달을 먹다’ 제목 자체가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월식인 만큼 자신의 입장과 형편, 경험, 가치관으로 판단하다보니 상대방의 의중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다보니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출처:2007.12.22 서울신문 문화 23면 기사문 발췌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달을 먹다'가 월식이란 두 글자로 압축된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다면 그토록 답답해 하지는 않았을텐데...
의미를 알고나자 괜히 허무해 졌다. 그냥 원제 그대로 '내심'이었다면 책의 주인공들처럼 나까지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헤매지 않았을텐데 책의 제목마저 내용을 따라가려던 것처럼 너무 깊은 의미를 담기 위해 욕심낸 것 같다. 그나마 기사의 도움으로 궁금증이 풀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의 서평만큼은 쓰지 않고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관계는 복잡하고, 작가의 의도 역시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아 읽기에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이란 작품에서도 그렇듯 이 책에서도 김진규 작가의 글솜씨는 돋보인다. 그렇게 그녀의 글에 다시 중독되어 스스럼 없이 책장을 계속 넘기며 그녀의 글을 삼킨다. 또한 이 책에도 꽃차와 국화주 만들기, 약방의 약제, 곡하는 소리, 떡 타령 등 당시의 풍물과 생활상의 묘사가 탁월하다. 그래서 난 김진규 작가의 이런 재주가 현대물과 만났을 때는 과연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하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차기작은 시대물이 아닌 현대물이었으면 싶다. 비록 '달을 먹다'는 나의 기대와 조금 달랐던 작품이지만, 그녀의 작품이 갖는 특별한 매력은 여전했으므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 또한 버릴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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