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맨스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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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맨스 랜드... 익숙한 제목이었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본 것 같아서 찾아보니 역시 '노 맨스 랜드'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제목만 같을 뿐 두 작품은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일단 이 책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아니란 것을 알고 나서 다시 책 소개를 꼼꼼히 읽어 봤다. 책의 줄거리 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작품의 수상내역이었다. 카네기 메달, 마이클 프린츠 상, 안데르센 상과 같이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을 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나는 이런 작품을 쓴 작가의 정체가 궁금했다.
에이단 체임버스. 그의 이름이 낯설었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다른 저서로는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워낙 특이한 제목이었던 그 책이 떠올랐고, 그 책을 쓴 사람이 에이단 체임버스란 사실에 놀랐다. 내용도 모르는 책을 몇 년째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렇게 늦게라도 그의 작품을 만날 인연이었나 보다.
<노 맨스 랜드>는 각기 다른 서술자가 등장해 현재와 과거를 이야기 한다.
1995년 현재. 영국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열 여덟살의 제이콥은 갑자기 몸을 다쳐 네덜란드에 오지 못하게 된 할머니를 대신해 암스테르담으로 짧은 여행을 왔다. 여행이 안겨주는 묘한 흥분과 들뜬 기분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그 또래의 소년답게 성적 호기심 또한 왕성해서 이국 소녀와의 로맨스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평소 '안네의 일기'를 열렬히 좋아했던 그는 가장 먼저 안네의 집을 찾았고 관광 후 잠시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쉬던 중 '톤'이란 친구를 만났다. 그러나 그 후부터 제이콥의 여행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1944년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외곽 지역에 살고 있던 열 아홉살의 헤르트라위는 부모님과 함께 그들의 집에서 부상당한 영국 군인들을 돌보고 있다. 하나 뿐인 오빠는 생사조차 알 길 없고, 그녀의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빠를 돌보듯 타국의 병사들을 돌보는 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트라위는 영국에서 온 군인 '제이콥'을 만난다. 그녀의 집을 지나던 길에 그녀가 건네준 물을 받아마셨던 제이콥이 폭격으로 부상을 당한 채 그녀의 집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 때부터 헤르트라위는 제이콥을 보살피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된 것처럼 그를 위해 헌신한다.
이렇게 두 제이콥과 헤르트라위의 얽힌 인연과 그 비밀은 반전이랄 것도 없이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을 일찌감치 알게 됐을 때도 이 책은 여전히 재밌었다.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제 각각 긴장감 있게 전개되며,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시시 각각 변화하는 상황 그리고 갈등 요소들이 전체 스토리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차식 구성의 묘미라 할 수 있는 시기적절한 이야기 끊기는 이어질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하다. 제이콥과 헤르트라위의 이야기에서 가장 다음 대목이 궁금한 순간, 이야기는 툭 끊어지고 서로의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이런 방식이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놓거나, 집중력을 흐트려 놓을 것 같지만 묘하게도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교차식 구성은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봐왔었다. 그래서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노 맨스 랜드>만큼 집중해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어나간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다. 최근에 읽었던 <피아노 교사> 역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두 서술자가 현재와 과거 시점을 번갈아 가며 전개해 나갔지만 두 작품 중에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나는 <노 맨스 랜드>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노 맨스 랜드>를 재밌게 다 읽고나서 책장을 덮은 뒤 문득 이 작품의 주제는 뭘까 생각해 보았다. 하나의 주제를 꼽기에는 이 책이 이야기한 내용이 너무도 다양해서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전쟁, 사랑, 성(性), 동성애, 부모와의 관계, 안락사,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 등 한 권의 책에 하나씩 담겨도 부족함이 없을 내용들이 <노 맨스 랜드>에서는 제이콥과 헤르트라위를 빠르게 스치듯 지나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담을 큰 그릇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힌트는 이 책이 받은 많은 상들이 결국 '청소년 문학상'이라는데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바는 제이콥과 헤르트라위라는 두 명의 십 대 소년, 소녀가 낯선 환경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 생과 사, 사랑과 이별, 친구와 가족 등 우리를 한 뼘씩 자라게 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에이단 체임버스의 글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모두 찾아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에는 에이단 체임버스의 '댄스 시리즈'로 불리는 여섯 권의 책 중에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와 <노 맨스 랜드> 단 두 권만이 들어와 있다. 그의 작품마다 십 대의 '성(性)'과 동성애 코드가 어느 정도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시리즈라고는 해도 등장인물이나 스토리가 연결된 것은 아니라고 하니 조만간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라는 작품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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