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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맛의 초콜릿이 담긴 선물 상자

by 푸른바람꽃 2010. 1. 12.

근처: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2009)

저자 박민규  공저자 은희경  공저자 전성태  공저자 배수아  
출판사 중앙북스   발간일 2009.09.22
책소개 한국 소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집!2009년 제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순원문학상은 우리...

 

공기보다 가벼워 보이는 깃털 하나가 팔랑 팔랑 내려와 한 남자의 발치에 떨어진다.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그 남자는 옆에 앉은 할머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항상 인생은 초콜릿 상자같은거라고 했어요. 어느것을 잡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직사각형의 초콜릿 상자 속에는 겉으로 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이는 초콜릿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러나 어느 초콜릿을 집느냐에 따라 달콤함을 맛볼 수도 있고, 때로는 조금 씁쓸한 맛을 느낄 때도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 중 이 장면, 이 대사가 떠올랐다.  

하나를 골라 살살 녹여 먹어 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는 열 가지 종류의 초콜릿들이 담긴 선물 상자와도 같은 책이 바로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그럼, 뭐 부터 맛볼까... 고민도 잠시... 어느 것을 먹어도 맛있을 것 같지만, 그 맛이 제일 궁금한 것부터 집어들었다. 나는 박민규의 <근처>를 선택했다.

 

최근에서야 접하게 된 박민규 작가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간 본 적 없는 파격적인 문단 구성과 현실을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 그리고 이것을 그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까지 그의 작품은 처음 읽을 때보다 반복해서 읽을 때 더 좋은 것 같았다. 평범함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박민규 작가의 작품은 낯설어서 어색함 그 자체였지만,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의 영광을 안으며 첫 작품으로 실린 그의 글을 읽자마자 그새 그의 글에 빠져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 말기 간암 환자가 되어 고향을 다시 찾은 '나'. 그는 그 곳에서 그의 어린시절을 추억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눴던 친구들의 현재와 마주한다. 외롭고 외로운 인생. 사십년을 살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이란 그가 주인공인 삶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그의 삶이 그를 이끄는 대로 그는 살아온 것뿐임을 깨닫는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  (중략) ...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박민규 作 근처 p.39)

 

죽음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삶을 스스로 정리하라고 하는데 내 삶이 마치 내 것같지 않은 기분.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나도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금새 그런 생각을 털어버리고 또 일상에 섞여 들어 간다.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나와 달리, 주인공 '호연'은 더 깊은 허무를 느꼈을 것이다. 그가 이제와서 삶의 근처가 아닌 중심에 선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니, 그가 서 있는 그 곳이 어디인들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그래서 늘 그렇듯 삶도... 죽음도... 다만 이 근처 어디에 있을 것이란 짐작만으로 살아가는 '호연'의 인생이 곧 우리의 인생 모습과 닮아 보였다.

 

이 후의 작품들도 모자이크처럼 알록달록 제 빛을 내고 있었다. 

 

강영숙  「그린란드」 에서는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사라져 버린 남편이란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할 말을 잃었다. 

 

김경욱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에서는 최근 벌어진 인면수심의 아동 성폭행 사건과 맞물려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녀가 불러주는 크리스마스캐롤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리아로 들렸다. 

 

김사과  「정오의 산책」은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또 다른 주인공 '한'은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계기로 삶에 초연한 자세를 갖게 되나 그것은 어쩐지 불안하고 파괴적이며, 암울하다. 결국 결말 부분에서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그래서 따뜻하고 여유로운 제목과는 너무 달랐던 이야기였다. 

 

김    숨  「간과 쓸개」의 주인공 역시 말기 간암환자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같고,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린 나무 즉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 곧 그의 인생을 상징한다. 아파서 죽는 것보다 인생의 끝자락에 홀로 남겨진 고독이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한 때 누구나 경험해 봤음직한 짝사랑의 감정을 아주 잘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미영'이 느꼈을 모든 감정 쉽게 감정이입하며 재밌게 읽어 나갔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등장했던 어린시절 '병만'과의 일화가 '선배'와의 사건과 오버랩되며 흥미로웠다.  

 

김중혁  「C1+y=:[8]:」 이 책에 실린 열 가지 이야기 중 가장 제목의 의미가 궁금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책에서 그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됐을 때 그 재밌는 발상에 놀라웠던 한편, 나의 상상력 수준이 바닥을 치고 있음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 어쨌든 스케이트 보드와 정글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정말 긴허리아기말원숭이가 생명의 은인이라니... ^^;;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죽음이 가져온 존재의 상실이 <없음>이란 두 글자로 표현된다. "우리가 곧 없음에 불과하다면,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 여기 있는 것인가."(p.268). 이처럼 <없음>이 결과적으로는 <있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 이야기에는 안나와 루시아, 요한이 등장한다. 학원에서 처음 만난 안나의 첫사랑 요한. 그러나 그와의 가장 달콤했던 순간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으로 이어진다. 나는 박민규의 작품에서도 '요한'이란 이름의 사내를 만났지만, 그 때는 왜 떠오르지 않았을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원에서 만났던 '요한'이란 이름의 아이를 잠시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안나처럼 나도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고,  은희경 작가의 작품은 언제, 무엇을 읽어도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성태  「이미테이션」 이태원에만 가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짝퉁 명품이 판을 친다. 사람도 짝퉁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글로 표현해낸 이 작품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진짜'보다 '가짜'가 더 편해서 '가짜' 인생을 살고, '가짜' 사랑을 하며, '가짜' 가방을 드는 사람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것은 스스로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책의 앞 뒤로 박민규 작가의 수상소감과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박민규 작가의 수상소감을 읽으며, '아... 글 잘쓰는 작가의 수상 소감이란 또 다른 작품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뷰 글을 통해 박민규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야금 야금 빼먹다 보니 어느새 텅 비어버린 초콜릿 상자.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열 가지 맛이 전해준 느낌들로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