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이외수 작가가 1983년 집필을 완성해 그 즈음 세상에 나온 책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벌서 서른을 내다보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재출간 되었음에도 내게는 신작이나 다름 없었다. 이외수 작가의 신작을 드문드문 읽어 왔지만 그의 오래된 작품까지 꼼꼼하게 챙겨볼 정도는 아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사부님 싸부님>은 독특하게도 '우화상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다.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우화... 어린시절 즐겨 읽던 그 이솝우화처럼 말이다. 평소에도 남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은 해 왔기에 이외수 작가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우화는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컸다.
<사부님 싸부님>은 저자가 직접 그린 단순명료한 그림과 의미를 파고들자면 한도 끝도 없는 모호한 말들로 채워져 있었다.
새하얀 여백에 덩그라니 원이 하나 있고, 그것이 뭐로 보이냐고 묻는다. 못 생긴 동그라미? 언뜻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벌써 저자의 꾸짖는 소리가 귓가를 쟁쟁하게 울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가 나를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내가 나 자신의 닫힌 생각에 실망하며 자책하는 소리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똑같은 그림을 보고 그저 동그라미라는 시시한 대답 말고 보다 '나 다운'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살아가면 갈수록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의 생각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기에 급급한 내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생각들은 책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 된다. 책의 주인공은 하얀 올챙이다. 남들과 같지 않으면 무조건 돌연변이 취급하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 올챙이는 특이한 모양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올챙이가 특이한 이유는 겉모습이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올챙이는 자신이 태어난 저수지를 벗어나 자꾸 바다로 가려고 한다. 바다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지만... 그 올챙이는 무조건 바다에 가고자 한다. 올챙이에게 바다는 '삶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동경하는 유토피아적 공간, 혹은 각자의 꿈, 이상과 같은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이정표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곳에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던 곳이었다. 지나는 사람에게 잠시 묻기로 했다. 저 곳에 가면 무엇이 있냐고... 이 질문은 그 곳에 들렀다 갈만한 볼거리가 있냐는 뜻이었다. 기대와 달리 그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분의 대답은 "가도 별 볼 일 없으니 가던 길이나 계속 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미지근한 대답까지 들은 마당에 그냥 가도 될 것을 결국에는 차를 돌려 그 곳으로 갔다. 뭐가 있건 없건 이미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그 곳에 가겠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는 사람에게 그 곳에 대해 물었던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사부님 싸부님>의 올챙이도 스쳐 지나가는 각종 물고기들과 거머리, 심지어 전선에게까지 '바다'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그리고 그 대답이 무엇이든 올챙이는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하얀 올챙이 한 마리와 그를 '싸부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작고 까만 제자가 나누는 대화는 콩트와 같았다. 제자는 제자답게 온갖 질문을 던지고 스승은 스승답게 되려 질문으로 답한다. 간혹 답이라고 들려주는 것조차 뜬 구름 잡는 소리다. 이 모습이 사이비 스승 같아 보여서 '싸부'라는 호칭에 '사부'보다 잘 어울린다. 그런데 그 사이비 스승의 대답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으니 그것 또한 묘하다고 할 수 있다. 우화 중에는 '여우와 신포도'처럼 교훈이 눈에 보이는 경우가 있는 반면, <사부님 싸부님>은 각자 어떤 마음의 눈으로 이야기를 보느냐에 따라 각양 각색의 의미로 다가온다. 아직은 이 책을 한 번씩 밖에 읽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 때는 지금과 또 다른 의미를 전해줄 것만 같다. 이 책의 활자와 그림은 인쇄된, 그래서 고정불변의 것이지만 마음의 눈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거듭 읽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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