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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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제라는 신통치 않은 제도때문에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1년 후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애시당초 그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대학에 입학한 것이었는데, 학부제라는 관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1학년 성적을 기준으로 학과 선택의 우선권을 준다고 해서 별 수 없이 학점관리에 신경 쓰느라 시험기간 때는 고3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만 되면 마음껏 그 자유를 누리리라 다짐했건만 신입생 때부터 선배들의 취업난을 보고 듣게 되자 그런 낭만조차 누릴 겨를이 없었다. 곧장 공무원 시험 준비에 돌입하는 친구부터 토익책을 끼고 다니는 친구, 해외 어학 연수를 알아보는 친구들까지 모두가 쫓기듯 미래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 물살에 휩쓸려 나도 4년간 종종걸음 치며 대학을 다닌 것 같은데 졸업하고 나서는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에 와서 나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4년의 대학시절을 보냈다는 점이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지도 않았고, 열정적으로 뭔가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 때는 왜 그랬을까 한참이 지난 후 다시 생각해 보니 결정적으로 당시의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친구들도 그랬고, <파랑이 진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료헤이와 그의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상황이다.
료헤이도 무엇을 하자는 생각이 없었다. 아무 목적도 없었다.
사 년 동안 이것만큼은 배워두자는 것도 없었고, 자신을 이 시설 대학으로 유혹한
사노 나쓰코라는 힘에 부치는 자유분방한 여학생의 마음을 붙잡을 자신감도 없었다.
마음에 있는 것은 푸념뿐이었다. (중략) 아니, 단지 일직선으로 돌진할 수 있는 목표라도 있다면. (p.35)
"일직선을 돌진할 수 있는 목표"를 갖고 싶어하는 료헤이의 심정을 표현한 이 대목으로 인해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대학에 입학하고 료헤이가 겪었던 목표 부재에 따른 방황을 스무 살의 나도 겪었다. 다행히 료헤이는 가네코라는 듬직한 친구를 만나 우연찮게 테니스를 다시 시작하게 되지만, 내게는 그런 열정의 대상조차 없었다. 료헤이는 친구의 강압에 못 이겨 테니스에 몰두하는 자신이 때때로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료헤이의 대학생활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이 책의 장르를 굳이 나누자면 청춘소설이라 분류해야겠지만 여전히 마음이 성숙하고 있는 앳된 청년들의 성장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이와 비슷한 작품으로 '다이브'가 있다. 다이빙 스포츠를 통해 네 소년의 성장통을 그리고 있었던 '다이브'와 '<파랑이 진다>는 닮은 구석이 많다. 그래서 자연히 '다이브'와 이 작품을 비교하며 읽게 됐다. 다이브에 등장했던 소년들처럼 <파랑이 진다>의 료헤이, 가네코, 안자이, 구다니는 테니스에 그들의 열정을 쏟는다. 비록 '다이브'에서처럼 국가 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큰 목표는 감히 꿈도 못 꾸지만, 끈기와 성실은 다이브 소년들에 뒤지지 않는다. 프로 선수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테니스를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료헤이는 늘 의품을 품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테니스를 좋아한다는 것, 그 이유만으로도 그것에 최선을 다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된다.
젊은 그들에게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사랑의 열병이었다. 나쓰코와 유코라는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두 여자친구를 사이에 두고 료헤이와 가네코, 안자이, 구다니는 서로의 마음을 농담처럼 드러냈다가도 진심은 꼭꼭 숨긴다. 서로를 향한 가슴 떨리는 기억과 엇갈린 사랑, 실연의 상처, 아픔 등이 모두의 마음에 흉터를 남길 때 쯤 그들의 마음도 성숙해 있었다. 미야모토 테루의 작품은 <파랑이 진다>가 처음이었지만 저자는 이러한 청춘 군상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재주가 남다른 것 같다. 1982년 작품이라서 당시의 풍경을 엿보는 재미도 있으며, 이러한 작품의 매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농도 짙은 파랑으로 독자를 물들인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했던 다쓰미 선생님과 료헤이의 일화는 눈시울을 적셨다.
테니스 용어나 경기 규칙 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테니스 경기나 훈련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다이브'를 읽을 때도 다이빙 지식이 전무했었지만 다이빙 경기를 묘사할 때 부가 정보를 충분히 알려준 덕분에 더 긴장감 넘치게 읽었던 것에 비하면 이 점은 <파랑이 진다>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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