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冊 it now

교통경찰의 밤 - 교통사고의 어두운 그림자

by 푸른바람꽃 2010. 2. 17.

교통경찰의 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역자 이선희  
출판사 바움   발간일 2010.01.15
책소개 교통경찰의 밤을 그린 여섯 편의 연작 소설집! 미스터리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보이는 연작 서...

스무살이 되면 꼭 하고 싶은 일들 중 하나가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운전면허증을 받아 어른임을 인정받고 싶었고, 몇 년후에는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서둘러 운전학원에 등록해 일사천리로 운전면허를 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의 운전면허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분증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는 중이다. 면허 취득 기념으로 두어 번 도로 연수를 나간 것이 사단이 됐다. 그 때의 악몽 같던 경험때문에 더 이상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시 내가 깨달은 점은 이런 위험천만한 도로 위에서 구태여 나까지 교통사고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는 말아야 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운전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해자의 운명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닥칠 지 모를 피해자의 운명까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때로는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교통경찰의 밤>은 교통사고 사건을 소재로 한 6편의 연작 소설집이다. 그의 장편소설이나 시리즈가 아닌 단편은 처음 읽게 됐는데,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근래 책을 많이 읽을 수록 장편보다는 단편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각종 문학상 수상집을 읽을 때면 어쩜 이리도 짧은 글에 장편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지 신기할 때가 많았다. 바로 이 작품에도 그런 단편의 묘미가 제대로 담겨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꼈던 허를 찌르는 반전과 사건의 역발상, 결말이 주는 긴 여운 등이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각기 다른 단편들 속에 녹아 있다. 그래서 마치 히가시노 게이고의 짧은 소설 6권을 읽은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교통경찰의 밤>에 등장하는 다양한 교통사고 사건들의 겉모습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교차로 차량 추돌사고, 트럭 전복사고, 도로 위 쓰레기 무단투기 등 뉴스에서 봤음직한 일들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답게 매우 독특하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친숙한 교통사고를 그만의 이야기로 재구성해 더욱 신선함을 주는 것이다. 작가의 경험과 창작이 적절이 조화된 이 이야기들에서 교통사고의 다양한 양상과 사건 피해자들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6편의 단편들이 모두 인상깊었으나 내게는 유독 두 번째 이야기인 <분리대>에 등장했던 내용들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원래 규칙은 양날의 칼이야.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한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지.

그런 경우에 중요한 건 그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은 날카로운 칼을 형식대로 휘두르거든."     <분리대> 중  p.90

 

법률은 조금만 어긋나면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서 법률의 분리대를 넘은 것이다.     <분리대> 중  p.100

 

비단 교통법규 뿐만 아니라 법이란 것은 모두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법은 선법(善法)이 되기도 하고, 악법(惡法)이 되기도 한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 공방이 끊이지 않는 한 이런 교통법규의 양면성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정작 교통사고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뺑소니 사건은 소재로 등장하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 궁금증은 작가가 남긴 '10년 만의 후기'에서 풀렸다.

 

글을 쓰기 전에 나 자신에게 맹세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뺑소니만은 다루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쓰고 싶은 것은 누구라도 '사람을 칠 수 있다는 것'이지,

'도망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0년만의 후기> 중 p. 269

 

본문의 내용만큼이나 멋지게 이 책을 마무리 하고 있는 후기까지 읽고 나서 작가의 바람직한 가치관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누구라도 교통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으나,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는 잊지 말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이 연작 소설집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꼭 당부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