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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맞서는 용기!

by 푸른바람꽃 2010. 2. 25.

 

일반인들에게 정신병원은 낯선 곳이 틀림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말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정신과 상담을 감기 치료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고로 머리에 꽃을 달고 웃는 여인네는 멀리해야 한다는 것 쯤은 상식이고,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말처럼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란 것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정서에는 마음의 병을 얻은 사람이나 그 사람들이 치료받는 시설까지 모두 기피대상 1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몸이 아플 땐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도 마음이 아플 땐 그 고통을 혼자 감내하려 한다. 더군다나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중에 정신과 병력이 있는 사람들마저도 부끄럽게 여기는 실정이니 정신병원의 실상은 일반인들이 알래야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되었다.

 

자난해 화제를 모았던 문학상 수상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내 심장을 쏴라>였다. 심사위원들의 호평 속에 2009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이 작품이 바로 그 미지의 영역, 정신병원에서의 소동을 그렸다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또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서평에서 엿본 작품의 재미와 주제가 이 책을 내게로 인도했다. 죽을 각오로 내뱉는 세상을 향한 외침, 내 심장을 쏴라! 이 책이 제목처럼 내 심장도 명중시킬지 기대하며, 나는 수리 희망병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수리 희망병원 입원 동기생인 이수명과 류승민. 이 두 남자는 각기 다른 사연으로 수리 희망병원으로 오게 됐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 213)

 

이수명은 이전부터 환청과 공황장애 등으로 정신병원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다시 아버지에 의해 입원한 경우였고, 류승민은 어린시절 방화 경력이 있긴 했지만 집안의 재산싸움에 휘말려 계모와 이복형제들에 의해 납치, 감금 되다시피 입원하게 됐다. 그들과 함께 수리 희망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점은 말이 병원이지 정신병원의 성격상 그 운영방식은 교도소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교도소 수감자들의 생활과 정신병원 환자의 생활에서 차이점은 조금 더 자유로운 것과 침대생활을 한다는 것 정도다.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정신병원 생활을 생생히 묘사한 본문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울고 싶었다. 밤마다 들려오던 구두소리를 그날 밤엔 끝내 들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는 병원이 있다니.

문이 부서지도록 두들기는데, 아래층까지 뒤흔들 법한 소음인데 대구하는 이가 없다니.

순간 너무나 당연한 전제라 염두에서 빠져버린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두들기고 있는 것은 정신병원 패쇄병동의 문이었다.

문 두들기는 일이 주목거리에 속하지 않는 곳이었다.   (p. 203)

 

작가는 억압되고, 비인간적인 정신병원 시스템을 폭로함에 있어 유머를 잃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점도 바로 작가의 이 '냉소'에 있다. 주말 저녁의 폭로형 시사다큐에서나 등장할 법한 수리 희망병원의 실태 고발은 '그것이 알고 싶다' 보다 '개그콘서트'에 가깝게 그려진다. 여기에 김용, 만식씨, 십운산 선생, 한이와 지은이, 현선이 엄마 등 개성넘치는 인물들이 예측불허의 행동으로 수명과 승민의 이야기에 활기를 더한다.

 

그러나 <내 심장을 쏴라>란 작품이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했던 바는 정신병원이 아닌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수명과 승민을 통해 생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금 그들의 생을 살아가고자 일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리라. 심장이 펄떡이고 숨을 쉰다고 해서 모두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수명과 승민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나마 승민의 경우에는 미국에서의 시간이 그로서는 유일하게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경험이었다. 그런 승민은 삶의 행복을 이미 맛 본 경우이기에 끊임없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애쓴다. 그러나 수명의 경우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란 것 자체가 없었던 인물이다. 어머니의 자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다분히 아버지에 의해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수명에게는 승민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런 수명이 차츰 승민에게 동화되고 승민 역시 수명에게 의지하며 수명과 승민 모두 변화되어 간다. 이 두 남자가 벌이는 희망병원에서의 소동들은 버디무비(Buddy Movie) 한 편을 보는 듯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수명의 정신보건심판위원회에서의 심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정신보건심판' 역시 앞서 교도소와 정신병원의 유사점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가석방 심사위원회의 심사와 흡사한 느낌이다. 민폐형 인간인지 아닌지 마지막으로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심사의 시작과 끝, 그 사이에 있었던 수명의 희망병원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 된다. 그리고 드디어 수명이 '나'라는 사람으로 바로 서게 된 그 순간, 자신을 향해 겨눠진 세상의 총구를 향해 당당히 마주선다.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생에 대한 각성', 그것은 한 개인의 '자유의지'이자 세상 앞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