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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by 푸른바람꽃 2010. 3. 16.

적절한 균형

저자 로힌턴 미스트리  역자 손석주  원저자 Mistry, Rohinton  
출판사 아시아   발간일 2009.10.23
책소개 『적절한 균형』은 대학에 진학했으나 무리를 지어 괴롭히는 대학 선배들 때문에 기숙사 생활에 회의를 ...

 

초등학생 때 나는 육상부 선수였다. 아버지를 닮아 날 때부터 운동신경은 타고난 편이라 체육시간이면 모든 종목에서 거의 만점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유난히 자신 없어 했던 종목이 하나 있었다. 평균대였다. 바닥에 서서 보면 평균대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만만하게 보고 그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위태위태 하다가,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아래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 때는 평균대 위에서만큼 힘든 균형잡기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살아보니 인생이란 외줄타기에서의 균형잡기야 말로 그에 비할 바가 못 될만큼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해 보이는 삶의 조각들도 가끔은 바둑돌처럼 흑과 백, 슬픔과 기쁨, 미움과 사랑, 그리고 희망과 절망으로 양분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인생의 평균대 위에 올라서서 내일을 꿈꾸는 것! 그것 또한 삶의 묘미이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은 바로 이 인생의 평균대 위에 서 있는 인도 사람들이 희망과 절망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몇 년 전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을 때와 유사한 기분이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여전히 가슴 속에서 들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읽은 것은 870여 쪽에 달하는 묵직한 한 권의 책이었지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1970년대의 인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세계 2위의 인구 대국답게 책 속의 모든 풍경에는 인도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내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특유의 냄새. 온갖 감정과 행동  등이 어우러져 거대한 나라 인도가 완성됐다.

 

 1975년에서 1977년 사이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인도의 정국은 극도의 혼란기였다. 총리의 비리와 부정이 권력에 의해 암묵적으로 덮혀버렸고, 그 후 시민들과 반대 세력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국가의 난폭한 공권력이 국민들을 핍박했다. 이러한 인도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나라의 계엄 사태 때와 매우 흡사했다. 돈만 있으면 정의마저도 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이시바와 옴, 디나, 마넥 역시 평범한 소시민들로서 서로 다른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들은 모두 디나의 낡은 아파트로 모인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는 조연일지 몰라도 우리의 인생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이시바, 옴, 디나, 마넥도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선 조연이지만 그들의 극적인 삶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인도가 어떤 나라였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시바와 옴의 이야기에서는 '카스트 제도'의 잔인하고 추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디나의 이야기에서는 남성에게 억압받는 인도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넥의 이야기에서는 자본시장의 지배와 학교 내 폭력, 부정 부패 등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인도는 표면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인도의 전부라 믿었었고, 가끔 책이나 영화에서 접하는 인도라는 나라도 <적절한 균형>만큼 내게 인도의 내부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희망의 저울은 늘 절망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이 두 가지의 균형을 맞추기란 그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진데, 이것의 균형을  깨트리는데 앞장 서는 자들이 바로 국가와 권력자, 자본가들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이시바와 옴에게 닥친 불행은 나도 모르게 저자의 펜 끝을 원망할 정도였다. 불과 몇 쪽의 내용만으로 두 사람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고, 인생은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떠러졌다. 그 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시바와 옴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삶의 긍정적인 자세를 배웠다.

 

절망으로 기울어진 불균형의 상황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딱 그만큼의 새로운 희망을 갖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적절한 균형 맞추기에 실패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절망적 상황이 개선되었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각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인생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몸소 보여 주었다. 끝으로 이처럼 소중한 내용이 담긴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고마울 따름이다. 선물로 받지 않았다면 보석같은 책을 모르고 지나칠뻔 했다. 덕분에 인생에서 잊지 못 할 양서를 또 한 권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