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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오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에도 이제 익숙해진 탓인지 <인간>은 그만의 기발함이 2% 부족한 작품으로 느껴졌다. 아니면 이 작품과 비슷한 상상을 그의 전작 <나무>에서 이미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유리로 만들어진 우리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 곳에 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탈출할 방법도 없다. 별안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세상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곁에 있는 한 사람만 남은 것이다.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인간>은 파키스탄의 핵폭탄으로 지구의 인류가 멸망하고, 단 두 명의 인간만이 살아남게 된 후의 이야기다. 수조와도 같은 유리의 방에 갇힌 '라울'과 '사만타'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갇혀 있는 곳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말다툼만 벌인다.
과학자인 '라울'과 서커스단 호랑이 조련사인 '사만타'. 왜 하필이면 이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건지 나로서도 궁금했다. 작가는 라울과 사만타를 철저하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로 묘사한다. 그런데 극과 극인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작가가 보여주는 '사만타'라는 인물이 여성에 대한 편협한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울과 사만타는 직업에서부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라울에 비해 사만타는 예쁜 얼굴과 몸매를 소유한 그저 아름다운 여자일 뿐이다.
두 사람의 언쟁에서도 라울은 조목조목 사만타의 말에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정연하게 반박하고 있으나, 사만타는 매사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사만타는 어째서 백마탄 왕자님이나 기다리는 한심한 여자로만 묘사되는지 작가에게 불만이 쌓여갈 무렵 두 사람의 전세를 뒤집는 마지막 논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논쟁의 주제도 거창하게 얘기하면 인간이 과연 종속 가치가 있는가였지만, 요지는 결국 라울과 사만타의 동침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울과 사만타의 대화는 알맹이가 빠진 궤변처럼 들린다. 횡설수설하는 두 사람처럼 그것을 읽는 독자들도 대체 이들이 전하고 싶은 말이 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당신이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침을 뱉는 것은 비겁한 짓이야. p. 63
이 대사는 마치 이 작품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정말 이 작품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내가 <인간>을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인간>은 인간에 대한 고찰을 논하기에는 그 이야기가 너무 산만했다. 또한 결말은 짐작 가능한,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상상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그 결말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란 사실이다. 본문이 해설, 지문, 대사로 이뤄져 있긴한데 그것이 소설의 본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국내에도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진 것으로 아는데, 연극으로 보는 <인간>은 어떤 느낌일지 그 점만큼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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