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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 우리 아버지들의 비애

by 푸른바람꽃 2010. 4. 14.
 

 

故 장영희 교수님의 저서 중에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다 보면 아버지에 관한 가슴 찡한 문장이 있다.

 

"오늘도 아버지들은 가슴 속에 꿈 하나를 숨기고 자신을 팔기 위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정글같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p.46)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한 가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내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겠구나...' 하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한 가지 일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한 번도 나는 아버지가 지금의 일이 아닌 다른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천직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버지라고 해서 어찌 꿈이 없으셨겠는가! 나처럼 젊은 날의 아버지도 꿈을 꾸며 아버지 자신만의 미래를 설계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된 순간, 당신 자신의 미래가 아닌 우리 가족의 미래가 아버지의 꿈이 되었고 진짜 아버지만의 꿈은 가슴 속으로 숨어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작 <아버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정현 작가의 신작 <아버지의 눈물>에 등장하는 '흥기'도 다르지 않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대학생인 두 아들의 아버지이며, 공학연구소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 흥기는 50대 가장이다. 아내는 작은 아들의 사법고시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어서 자연히 흥기가 마음 쓰는 쪽은 자신의 핸드폰에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장돼 있는 큰 아들 상인이다. 열 손가락 중에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흥기에게 큰 아들은 다른 손가락들 보다 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흥기와 아내에게 다니던 지방 대학 복학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는 선전포고 후 잠적한다. 설상가상으로 흥기가 친구의 말만 믿고 시작했던 주식은 본전도 건질 수 없는 지경인데, 그 자금의 출처가 연구소의 공금이었다. 금액이 커서  당장 빌릴 곳도 마땅치 않고, 아내에게는 섣불리 말도 못 꺼내며 전전긍긍하는 흥기.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흥기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아들처럼 돌봐주는 누나와 아내, 아이들 생각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이 후 흥기는 생과 사, 큰 아들의 진로, 돈의 유혹 등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때마다 흥기의 선택들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흥기를 다시 바른 길로 이끌어 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누나에게 걱정끼치지 않는 동생,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흥기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쉽게 내던질 수 없었다. 결국 모두가 아버지에게 기대고 살 듯이, 아버지도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곳은 가족의 품밖에 없다는 점을 <아버지의 눈물>은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가족. 이 두 가지 테마는 작가의 전작인 <아버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번 작품에서는 그 때만큼의 감동은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결말이 사뭇 달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고, 나는 그 원인이 주인공 '흥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서는 고립된 가부장적 성격의 주인공이 말기암을 선고받고 다시금 가족과 화해하는 스토리로 전개되며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러나 정작 제목에서부터 눈물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 작품에서는 눈물이 흐를만큼 가슴 뭉클한 대목이 부족했다. 흥기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중년 남자로만 보일 뿐 그다지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족들에게는 살갑게 다가서지 못해 빙빙 겉돌고, 직장에서도 자신의 뚜렷한 역할이나 성과가 없다. 그의 친구에게는 아내를 웃게 해 주자는 소박하면서도 진실된 인생 목표가 있는데 비해 흥기는 그런 것조차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흥기가 잠시나마 자살을 생각하거나, 중대한 사회 범죄를 꾀할 때도 그가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느낌보다는 현실을 도피하려는 나약한 남자로 보였다. 따라서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게 될 거란 기대과 달리 가족의 짐을 혼자 짊어지려는 어느 힘 없는 가장의 비애만을 엿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어느 잡지에서 김정현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사이 쉰을 넘긴 그는 중국 역사에 심취해 있었고, 중국에 머문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성공이 그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또한 당시 '가족'이란 주제가 버겁기만 했는데, 계속 '가족'에 관한 원고 청탁만 들어와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지금에 와서 다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오기까지 나름 고충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김정현 작가의 멍에이자 평생을 두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와도 같다. 끝으로 이 책의 제목 '아버지의 눈물' 하면 떠오르는 김현승의 시가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더욱 깊게 해 주었다.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