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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담론으로 자기를 정화시키는 두 남자

by 푸른바람꽃 2010. 6. 4.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저자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  역자 김수진  
출판사 시공사   발간일 2010.04.30
책소개 지적 스릴러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의 새로운 소설적 시도!스페인의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대학을 다니는 동안 과외활동으로 동아리 대신 나는 학회를 선택했었다. 학과 선후배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하여 운영하는 광고, 영상, 비평, 그리고 보도사진까지 네 분야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순전히 보도사진 학회를 담당하는 멋진 지도 교수님에 대한 호감때문에 시작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차츰 수동카메라와 흑백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어 대학 때를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보도사진 학회라고 할 수 있다. 암팩에 양손을 집어 넣고 오로지 손 끝의 감각만으로 릴통에 필름을 감아넣은 다음 현상하는 것이나, 암실에서 인화액 특유의 싸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때까지 종이에 사물이 드러나는 과정 들여다 보던 일은 모두 마술 같았다. 그런 실습 중간 중간에 교수님은 보도 사진에 대한 다양한 이론 수업도 해 주셨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내용은 아무래도 보도 사진 기자가 처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문제 즉, 보도사진 기자로서의 윤리, 양심 등에 대한 이야기는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에서도 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파울케스는 유능한 종군 사진기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제목에서처럼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어쩌다 그는 그와 한 몸 같았던 카메라를 놓고 대신 붓을 들게 된 것일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는 의문의 사내가 파울케스를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사내는 자신을 이보 마르코비츠라고 소개하며 파울케스에게 자신을 모르냐고 되묻는다.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그의 프레임에 담았던 파울케스에게 마르코비츠는 낯선 얼굴이었다. 끝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위해 마르코비츠는 자신의 얼굴이 찍힌 책자를 꺼내 보여주며 이 사진 속 남자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제야 마르코비츠를 알아본 파울케스. 그래도 왜 그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마르코비츠는 "당신을 죽이러 왔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그 사연을 들어보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전쟁 당시 참전 군인이었던 마르코비츠의 모습을 파울케스가 우연히 찍었고, 이 한 장의 사진이 이슈가 됨으로 인해 마르코비츠의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세르비아 군에게 아내와 아들마저 무참히 살해되고 짓밟히게 된다. 자신이 찍은 한 장의 사진... 그것이 낳은 비극적 결말을 파울케스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작품 중에서도 파울케스가 언급한 말로 등장하는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 이로써 마르코비츠가 파울케스를 죽이려는 이유는 인간적으로 납득이 간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죽이러 왔다는 이 남자에게 과연 죽이려는 의도가 있을까 의심스럽게 만드는 구석이 많았다. 

 

마르코비츠는 파울케스에게 그의 사진, 그림, 여인 등 시시콜콜한 것부터 전쟁, 예술, 인간의 본성에 이르기까지 심도 있는 주제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이 오고가며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간다. 그 과정은 흡사 스승과 제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친구 간의 토론과도 같았다. 마르코비츠의 이런 행동은 마치 파울케스에게 '당신을 죽이려 드는 내 마음을 당신이 좀 돌려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마르코비츠에게서 나는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그간의 세월이 그의 분노를 단단히 굳혀서 차가운 돌맹이로 만든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의 내면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이겠다는 위협에서 살기(殺氣) 보다는  파울케스에게 자신을 이 복수의 감정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구조 요청으로 보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저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그가 종군기자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 또한 전체적으로 철학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 톡특한 이야기 구성, 다음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서술 방식 등은 그가 왜 움베르트 에코에 비견되는 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다만 두 명의 화자들이 나누는 대화 자체가 무겁다.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언젠가 허물어져 내릴 벽에 전쟁화를 그리는 파울케스나 파울케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 등을 허물고자 하는 마르코비츠. 이 두 사람의 행위는 모두 자기 정화의 수단이지 않을까? 처음 만난 스페인 작가의 담론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지적스릴러의 대가답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묘미가 있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책장이 넘어갔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손꼽히는 <뒤마클럽>이란 작품도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