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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by 푸른바람꽃 2011. 6. 19.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박정석 | 시공사(단행본) | 201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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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이 참 재밌다. 처음에는 이런 이미지 사진은 어디서 났을까 싶었는데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아마도 저자가 직접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더니 그는 여자였고, 이미 세계 곳곳을 많이 다녀본 사람이었으며, 그가 쓴 여행서도 이 책이 처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도시 생활을 접고 바닷가 마을에서 닭을 키우고 채소밭을 가꾸며 귀농생활에 길들어져 있을 때 쯤 그녀는 자신이 식물화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잠시라도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은 선언하고 여행을 결심한다. 여행을 가기로 마음 먹은 이상 가장 중요한 선택은 여행지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그 수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인의 조언과 심사숙고 끝에 그녀는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해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거쳐 폴란드, 발트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지나 종착지인 바다 건너 핀라드까지의 여정을 계획한다. 기간은 두 달 남짓. 떠나기 직전의 공포, 피로, 고독을 무릅쓰고 그녀는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스탄불의 잿빛 야경을 시작으로 저자의 여행기는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서가 글 반 사진 반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이 책은 사진 보다 비교적 작은 글씨고 빼곡히 들어찬 그녀의 이야기가 더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녀의 글은 친구가 먼 여행에서 돌아와 차 한 잔 앞에 놓고 그곳에서의 다사다난했던 경험을 들려주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마디로 글이 맛깔스럽다.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닌 이방인이 그만의 시선으로 이국의 풍경을 보며 감탄하고, 색다른 문화에 당황하기도 하는 매 순간이 재밌게 서술돼 있다.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예전의 여행과는 모든 것이 정반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출발했었다. 서두르거나 초조해 하지 말고, 빵과 물로 대충 때우지 말며, 무거운 짐을 끌고 사방을 헤매고 다니지 않는 여행. 그리고 "화내지 않고" 여행을 마치고자 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낯선 곳을 여행하며 "화내지 않기"란 성인군자에게도 힘든 일이다. 특히 아끼던 고가의 카메라를 도난 당한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나쁜 경험은 자칫 여행 전체를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학하고 후회하고 남의 탓도 하며 스스로를 추스린다. 그리고는 다시 카메라를 구입해 여행을 계속해 나간다.

 

불가리아와 폴란드를 지날 때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여행서에서 보았던 풍경과 지명, 관광 명소가 다시 등장해 반가웠다. 그리고 드디어 핀란드에 다달았을 때는 저자의 지인들처럼 "카메모 식당"이 머리를 스쳤다. 항구에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갈매기와 함께... 그러나 저자의 핀란드 여행은 호숫가의 오두막과 한밤의 오페라로 잊지못할 추억과 휴식을 선물받는다.

 

여행지에서 만난 스위스 청년 줄리안과 동행하기도 하고, 먼 길을 마다않고 날아와준 친구와 핀란드를 둘러보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사이 여행은 끝이 난다. 무언가에 대해,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는 대신 그녀는 먼저 욕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기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혈기왕성한 시기에는 강렬하고 굉장한 그 무엇이 주는 찰라의 감동에 집착했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치열하고 전투적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치열함이 싫어졌다. 그리고 한 박자 쉬어가더라도 스쳐 지나기 보다 꼼꼼하게 세상을 마주하고싶어졌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에 보여지는 잔잔한 호숫가의 풍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그 속에 빠져들고 있다. "시간은 빨리 가고 소녀는 금세 어른이 되니,(p.54)"라는 저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사이 나도 어른이 되고 있었고, 소녀에서 어른이 된 저자의 글은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