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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혁명 - 슬픈 눈을 가진 이무기, 허균이 꿈꾸던 세상

by 푸른바람꽃 2009. 11. 15.

 

 

 

평소 김탁환, 최인호,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처럼 우리 역사에  픽션이 어느 정도 가미된 역사소설을 즐기는 편이다.

이런 역사 소설들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사실 그 이면에 있을지 모를 진실에 다가가기도 하고,

간혹 역사를 왜곡해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기도 하는 매력을 갖고 있어서 한 번 빠지게 되면  꽤나 중독성이 강하다.

그러나 역사소설과 사극 등은 늘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며 사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허구의 장르일지라도 그 소재가 실존 인물이며,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이런 딜레마는 역사 픽션물이 앞으로도

안고 가야 할 짐과 같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역사소설이나 사극 등에

빠지기 시작하면, 곧장 그에 관련된 사료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스로 사실과 허구의 구분을 명확히 짓고자 애쓴다.

 

내가 이러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생각 자체가 작품에 빠져드는 순간,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이것이 내게 역사 왜곡이나 역사적 편견으로

자리잡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접종과도 같은 절차가 되어 버렸다.

 

<슬픈 혁명>을 펴기 전에도 나는 인터넷으로 대략 허균에 대한 사료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의 개인사와 주변 인물, 그리고 역모로 몰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강의 정보를 살핀 후에야

'허균'이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끝냈다.

 

 

혁명가이기 보다 그 재주가 아까운 풍운아 

 

책의 뒷면에 김홍신 교수가 남긴 글에도 나오듯 <슬픈 혁명>은 여느 역사 소설과 달리 '허균'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하여

마치 허균의 입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 같은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허균의 일기를 엿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그동안 읽어 왔던 역사소설과는 분명 차별화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이야기는 허균의 스무살 시절, 그의 작은 형님 허봉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허난설헌으로 알려진 허균의 누이, 허초희에 대해서는 드문드문 들은 바가 있었으나, 그의 두 형님들에 대해서는

잘 알 지 못했다. 그의 입을 빌어 듣게 되는 형님들에 대한 존경과 특히 둘째 형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출생과 관련해 허봉, 허초희, 허균이 동복형제였기 때문에 큰 형님에 비해 이들에 대한 허균의 감정도

남달랐을 것이다.

 

이름 있는 가문의 막내 아들로서 가족들에게 귀염 받고 자랐을 법한 허균에게서는 그래서인지 막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혀균 그 자신은 유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한 것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도 어찌보면 간간히 드라마에 비치는 귀한 집안의 막내아들이 제멋대로 사는 요즘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허균은 제 누이가 매부의 주색잡기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런 누이에 대한 측은지심과 매부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책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허균은 지어미를 두고,

후사에는 무관심한 채 기생들과 어울리며 기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습은 모순된 태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허균 그와 매부 김성립의 차이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에 사는 여자로서 유교의 남녀차별적인 가치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정에 소홀하며 밖으로만 나돌았던 못난 지아비의 모습은 허균 스스로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가 사는 동안 끊이지 않았던 그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보자며 분기탱천했던 혁명의 무리를 이끌기에 이런 점에서 그는 이미 자격미달의

수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허균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유교적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작가의

글을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삼 년 상 중에 여자를 멀리하는 것만이 부모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이라고는

나 역시도 생각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단편적인 유교적 규범을 따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큰 일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서의 덕목으로 갖추어야 할 자기 절제와 희생, 청렴결백함, 올곧은 마음가짐 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본 <슬픈 혁명>에서의 허균은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이기 보다 그가 가진 재주가 아까운 풍운아에 가까웠다.

 

 

슬픈 눈을 가진 이무기, 허균이 꿈꾸던 세상

 

무절제한 그의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허균에게 본받을 점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그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명망 높은 집안의 적자로 태어난 그가 적서 차별에 반대하며 사람 사귐에 있어 벽을 두지 않았고, 그가 지배자의

위치에 있을 때 백성들의 고통을 눈 감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사람을 귀하게 여겼던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남기 숱한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호민론>이라 할 수 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백성이 있기에 나라가 존속하고 왕도 왕 노릇을 하며 관리들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오직 백성뿐이니 물이나 불, 호랑이보다 두렵게 여겨야 마땅하다.

 

 

<호민론>에 등장하는 그의 이런 생각들은 지금의 정부와 국회를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애민정신만큼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이 큰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가 안타깝다.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손곡 이달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그의 경솔함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면

역사는 분명 허균을 지금과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익히 알고 있었던 허균의 삶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 보게 한 책이

<슬픈 혁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만큼 의외로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것만 같았던 <홍길동전>에 대한

언급은 이 책에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그런 소설을 짓게 되었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당시 허균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 오히려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제목이 <슬픈 혁명>이기에 그가 역모로 몰리게 되었던 그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슬픈 혁명>은 허균의 청년기부터 장년기에 이르는 시간을 따라 전개되는 평전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래서 평소 좋아하던

사건 전개의 흥미진진함이나 사료 이외에 그 사건에 숨어 있을 법한 모종의 이야기 등은 만날 수 없어서 아쉬움도 컸다.

게다가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허균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어떤 시각으로 풀어냈을지 가장 궁금했던 대목이었는데,

여운만 가득 남긴 이 책의 결말은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났을 때마다 찾아오는 허전함을 두 배로 가중시킨다.

 

때를 맞지 못한 늙은 이무기의 슬픈 눈을 마주하며 허균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390여 년이 흘렀건만, 정작 그가 꿈꾸던 백성을 가장 귀히 여기는 세상은

여전히 요원하게 느껴지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