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황제 박영규 | 살림 | 20111109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 더 보기 | 관련 테마보기 |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순종이 아닌 고종에서 이미 '마지막'이란 말이 더 와닿는다. 고종 때 이미 국운은 기울었고, 망국의 '황제'란 칭호는 그저 허울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순종이 제위하던 때의 역사는 학교에서나 밖에서도 제대로 배워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를 알고자 노력한 적도 없었다. 그런 순종이 몸소 도쿄로 건너 가 일왕 요시히토를 알현했다는 사실은 이 책 <길 위의 황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역시나 그는 백성들에게 굴욕감만을 안겨준 나약한 왕이었단 말인가! <길 위의 황제>는 과감히 순종의 입을 빌려 순종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도쿄로 갔으며,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암담한 기억과 슬픔, 자괴감 등을 마치 그의 일기를 엿보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은 황제의 자리를 그의 차남 순종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황제라 불리지만 그가 황제로서 행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하된 자들은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고, 순종의 주변에는 늘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조선 왕실의 황태자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유길은 어린 나이에 어미와 생이별을 하고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고 덕혜의 운명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선진 문물과 학문을 가르친다는 명목하에 왕실의 가족을 인질로 잡은 일본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조선 황제의 목숨을 살려둔 이유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전시 행정의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다.
<길 위의 황제>에서 순종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와 일본의 술수에 어쩔 수 없이 도쿄 방문길에 오른다. 기차에 몸을 싣고 부산을 거쳐 일본의 군함을 타고 일본 본토에 들어가 천황 앞에 절을 한다. 그리고 곤도가 작성한 일왕와 황후에게 바치는 글을 읽어내려가는 순종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저절로 울분이 치솟하았지만 순종은 의외로 무감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승자의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으리라 상상했던 일왕 요시히토의 얼굴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폐주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 씁쓸함을 뒤로하고 그는 요시히토에게 유길을 다시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쓰지만 그 역시 쉽지가 않았다. 일본에서 학문을 닦고 군사 훈련을 받는 유길이 혹여 일본색으로 물드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런 유길에게 조선의 독립과 대한제국 황실의 부흥이라는 크나큰 과업을 물려주어야 함에 순종은 몹시 힘들어 했다.
어린시절에는 할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머니 명성황후의 대립과 갈등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고, 결국 그 여파로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어머니의 죽음을 견뎌야 했으며, 그 자신 역시 다량의 아편이 든 커피로 독살될 뻔하는 등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모진 삶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일본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다시 일어서는 날을 지켜보리라 그는 다짐한다. 그의 아버지 고종이 그에게 말했듯이 그 또한 동생 유길에게 말한다.
"...꼭 힘 있는 황제가 되거라. ...(중략)... 적들을 섬기고, 적들을 배우고, 적들을 안심시켜라. 그리고 비수를 품어라." (p.26)
산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던 그에게 고종이 공민왕의 이야기를 들어 전한 이 말은 순종의 마지막 황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강한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임을 반복하며 결국 그 말이 사실임을 지금의 대한민국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 파란이 많았던 조선의 근대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순종의 기억을 통해 재조명 하였다는 점이 매우 신선했다. 그 중에서도 민족의 독립투사로 칭송받는 안중근에 대한 민중과 대한제국의 황실, 그리고 일본이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이 특히 그러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가능한 듯 이 책의 결말은 상상조차 쉽지 않은 용서와 화해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그러한 삶을 살다 갈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이해해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본다.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으나,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담은 진솔한 서평임을 밝힙니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冊 it no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회의나 할까? (0) | 2011.12.17 |
---|---|
제로의 초점 (0) | 2011.12.11 |
고구레빌라 연애소동 (0) | 2011.12.04 |
처음 만나는 명상 레슨 : 누구나 쉽게 따라하는 15분 명상 (0) | 2011.11.25 |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0) | 2011.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