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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it now

수박 향기

by 푸른바람꽃 2012. 7. 30.
수박 향기 (양장) 수박 향기 (양장)
에쿠니 가오리(Kaori EKUNI), 김난주 | 소담 | 201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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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날의 여름은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신나는 일이 많았었다. 100원을 꼭 쥐고 오빠와 동네 슈퍼로 달려가 50원짜리 쭈쭈바를 하나씩 사이좋게 입에 물고만 있어도 행복했고, 근처 공사장에서 퍼 올리는 지하수가 계곡 부럽지 않은 물놀이장이었으며,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빨간 고무대야에 한 가득 물을 받아 놓고 손가락, 발가락이 쪼글쪼글해 질 때까지 그 안에서 놀았었다. 그래서 유년기의 여름을 추억하면 잊지못할 기억이 한가득이다. 에쿠니 가오리가 이 여름, 새롭게 내놓은 <수박향기>에도 이 같은 여름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다. 단지 그 기억은 실제인지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기묘하다.

 

표제작 「수박 향기」를 시작으로 「후키코 씨」, 「물의 고리」, 「바닷가 마을」, 「남동생」, 「호랑나비」, 「소각로」, 「재미빵」, 「장미 아치」, 「하루카」, 「그림자」 까지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단편에는 '나(소녀)'의 기억 속에 각인된 여름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화자는 모두 소녀들이며 나름의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맡겨진 숙모 집에서 달아났다가 샴쌍둥이가 있는 외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유일한 친구였던 하숙 하는 언니와 복수를 계획하기도 한다. 또 말매미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손바닥 위에 그 매미를 올려놓았던 소년, 바닷가 마을 빵공장 근처에서 만난 아줌마, 증조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신칸센에서 만났던 나비 스티커의 여자 등 외로운 소녀의 곁에 의문의 인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깃털처럼 가볍고, 유리처럼 투명하며, 얼음물처럼 시린... 특유의 느낌과 감각들이 있다. 이번 작품 <수박향기>도 예외없이 이러한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들이 잘 드러나 있다. 장편이 아닌 단편이라서 부족하다거나 그렇지 않고 오히려 짧지만 강하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11편 중에서는 첫 작품 「수박 향기」와  「남동생」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외딴 집에서 느끼는 낯선 긴장감이 「수박 향기」의 미스터리함을 극대화 시켰으며,  「남동생」에서는 여름과 죽음, 이런 부조화가 또 있을까 싶은데 화자와 남동생과의 추억담에 이어 여름의 장례식은 싫다는 말 뒤에 따라 붙는 여름에 죽으리라는 예언적 다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현실이라고 믿기에는 꿈만 같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일들이 가끔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은 더욱 그러한다. 때로는 사실이 아닐지라도 사실이라 믿고 싶은 일들은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을 것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분위기는 빛과 그림자처럼 맑고 화창한 여름날에 걸맞지 않은 침울함이 숨어 있었지만 <수박향기>로 인해 내 기억의 화석을 오랜만에 꺼내어 보며 그 때 그 시절을 아련히 떠올릴 수 있었던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이글은 "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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