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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 '사과'만 하면 '죄'는 사라지는가

by 푸른바람꽃 2009. 12. 11.

사과는 잘해요

저자 이기호  
출판사 현대문학   발간일 2009.11.12
책소개 어수룩하고 모자란 두 청년의 사과 대행업! 재기발랄한 젊은 이야기꾼 이기호의 첫 장편소설『사과는 ...

단어들 사이에도 서로 짝이 있다면 '죄'의 짝꿍은 누구일까? 나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끼의 대표작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죄'는 '벌'과 붙어 다녔고, '사과'는 '잘못'과 어울렸다. 그런데 이기호 작가의 신작 <사과는 잘해요>에선 독특하게도 '죄'의 도착(倒錯)으로 '사과'를 끄집어 내고 있다. 어색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던 '죄'와 '사과'에 대해 작가는 복지시설에 살면서 '죄'의 고백에 길들여 지고, '사과'에 익숙해진 '나'와 '시봉'의 이야기로 이 두가지의 상관관계를 풀이 한다.  

 

더이상 가족들의 힘으로는 돌볼 수 없어서 시설에 맡겨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짐짝처럼 귀찮아서 시설에 버려지는 사람들도 있다. '나'와 '시봉'은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에 가깝다. 언제 어떻게 왜 시설에 오게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나'와 '시봉'은 시설의 터줏대감이다. 이들의 어리숙함을 시설의 원장과 복지사들은 악용하고, '나'와 '시봉'은 속수무책 그들의 손에 놀아난다. 책 표지에도 그려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시설 원장의 통제 수단이 정체불명의 "알약"이었다면, 복지사들의 통제 수단은 "폭력"이었다. 특히 '나'와 '시봉'이 복지사들의 폭력에 길들여 지는 모습에서 나는 고2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피터팬' 선생님을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생님들을 주로 과목명으로 불렀지만 유독 독한 선생님께는 특별히 별칭을 정해 불렀었다. 독사, 불독, 미친개... 등 다양한 별칭들 중에서 가장 예뻤지만 잔혹했던 별명은 단연코 '피터팬'이었다. 꿈과 환상을 심어준 동화 속 주인공 '피터팬'을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로 불렀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의 별칭 '피터팬'의 정체는 " 지게 다"의 줄임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각 학교마다 적어도 한 두 명의 '피터팬'들은 존재 했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담임선생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수업하시던 모습이 아닌 이성을 읽고 체벌에 열중하시던  모습이다. 핏발 선 눈동자와 부들부들 떨리던 손, 흩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을 정신도 없이 몽둥이가 부러지면 다른 반의 몽둥이를 빌려와서 때리고 또 때리던 '피터팬' 선생님... 그 순간 선생님은 체벌 학생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진심어린 사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 혹은 죄의 고백과 반성? 분명한 것은 선생님의 체벌이 피해 학생을 포함한 학급 전체에 효과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했으며, 1년 동안 우리 반의 선생님의 '매'에 복종했다. <사과는 잘해요>의 복지사들이 원생들을 다루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그들은 원생들에게 '죄의 고백'과 '사과'를 강요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나'와 '시봉'으로부터 시작된 '죄' 짓고 '사과'하기는 시설 전체로 퍼지고 이 마저도 귀찮아진 복지사들은 '나'와 '시봉'에게 '반장'이라는 허울뿐인 감투를 준 뒤 원생의 죄를 알아와 대신 '사과'하고 체벌을 받으라 명한다. 타인의 죄를 덮어 쓰는 것만큼 억울할 일도 없을텐데 놀랍게도 '나'와 '시봉'은 대신 사과하고 벌 받는 일에서 그들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다는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후 시설에서 나온 '나'와 '시봉'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사과대행업'을 시작한다. 대신 사과해 주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나'와 '시봉'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정육점 주인처럼 어이가 없었다. 그런 독자와 정육점 주인에게 '나'와 '시봉'은 '죄'란 무엇인지 단순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죄는요, 사실 아저씨하곤 아무 상관없는 거거든요."

 

"아저씨가 생각하는 거, 모두가 다 죄가 될 수 있어요."  (p.68)

 

이 대화로도 알 수 있듯이 '나'와 '시봉'이 시설의 복지사들에게 배운 '죄'와 '사과'는 결과적으로 복지사들이 원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나'와 '시봉'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두가 서로에게 '사과' 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시봉'은 '나'에게 "서로에게 지은 '죄'는 상대방이 아닌 스스로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서로의 '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았고,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나'는 그 후로 더욱 '시봉'에게 죄를 짓고 싶어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통제가 사라진 순간 '나'와 '시봉'을 묶고 있던 끈의 매듭도 풀어져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시봉'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범법 행위, 즉 진짜 '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태연자약하게 '죄'를 짓고, 그것이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한 술 더떠 상대방의 '사과'를 도와줬다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섬뜩했다. 과연 진짜 '죄'는 무엇이고, 그 '죄'를 상쇄시키는 것은 또 무엇인지 다소 혼란스럽다. 한편으로는 '죄'란 끊임없이 지어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살면서 내가 죄를 고백해 본 것은 어린시절 부모님께서 매를 드실 때가 전부였다. 그래서 '죄'의 고백은 내게 너무도 낯선 일이 되어 버렸다. 더 나아가 '죄'에 대해 무감해지지고 관대해 졌다. 왠만한 잘못은 실수로 포장하여 '사과'의 순간마저도 모면해 왔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저지른 크고 작은 '죄' 혹은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렵고 쑥쓰럽다. 따라서 '사과'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행하는 '나'와 '시봉'을 보고 있자니 무지함에서 오는 용기일지라도 부러울 따름이다. 내게는 죽기 전에 꼭 '사과'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사과'하지 못한 내 잘못으로 '미안함'의 무게는 점점 더해지고 있다. '나'와 '시봉'이 곁에 있다면 사과를 의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 그 때는 정말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겐 그 용기가 한 움큼은 더 필요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