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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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쯤... 한창 채팅과 동창생 찾기가 유행처럼 번졌었다. 당시에는 나도 이 두 가지에 빠져 몇 시간씩 컴퓨터 앞을 지킨 기억이 난다. 그러나 유행이란 것이 다 그렇듯 대중들의 흥미는 금새 시들해졌고, 온라인 상으로 알게된 사람들과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쉽게 만났으니 쉽게 멀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에 비해 이 책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에미와 레오는 잘못 발송된 이메일 몇 통을 계기로 소중한 인연을 이어나간다.
스팸 메일이 받은 메일함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 보낸 메일은 열어보지 않고 버린다. 그러나 레오는 에미가 잘못 보낸 메일에도 친절히 답장을 썼다. 에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사과 메일을 보냄으로써 이 상황은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 에미의 메일 실수는 반복 되고, 레오도 이제는 에미의 실수를 귀엽게 받아들이며 장난스런 답장을 보낸다. 끝말 잇기처럼 두 사람의 이메일 잇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몇 초, 몇 분, 몇 시간, 몇 일, 몇 주, 몇 달... 두 사람 사이에 이메일이 오가는 시간은 이렇게 대중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전화나 채팅 등 다른 통신 수단은 멀리하고 서로의 메일만 기다린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감정에도 미묘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사랑. 책의 내용을 이렇게 단순화 시키면 영화 '접속'과도 닮았다. 하지만 채팅의 반응이 즉각적인데 비해 에미와 레오의 이메일은 짧든 길든 '기다림'을 동반한다. 그 기다림이 견디기 힘들어지면서 이들에게도 '사랑'이란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삶의 위안이었으나, 알면 알수록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의 심경 변화를 이 책보다 섬세하게 다룬 소설은 없을 것이다. 에미의 시니컬한 어투와 레오의 썰렁한 농담, 에미의 적당한 빈정거림과 그에 맞선 레오의 에미식 말투 따라하기 등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두 주인공이 메일로 주고 받는 대화는 타인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실제 만나는 문제를 놓고 지나치게 주저하며 망설이는 에미와 레오의 모습은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이메일로 쌓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 만남으로 무너져 내릴까봐 두려워하는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지켜보는 독자로서는 심히 답답하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유행가의 노랫말이 에미와 레오를 대신해 내 입에서까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에미와 레오를 탓할 자격이 없다. 내게도 결국은 망설이다 얼굴은 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던 사이버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알게 된 그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주기적으로 대화를 나눴으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을만큼 심리적으로 가까웠었다. 해가 바뀌어 입대하게 된 그는 이메일 대신 편지를 보내 왔고, 나는 부지런히 답장을 썼다. 그러나 편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답장을 쓰지 않음으로 써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 이유가 바로 에미와 레오가 이 책 한 권에서 내내 고민하던 그 문제 때문이었다.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에미와 레오처럼 나도 만나고 싶었지만 만나기 두려웠고, 목소리가 궁금해도 통화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서로가 실망하게 되느니 차라리 좋은 추억으로라도 남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지만 후회스럽기도 하다.
결국 현실에서의 만남이 이 완벽한 관계를 무너뜨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에미와 레오의 선택도 망설이게 한다. 게다가 이들의 만남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에미가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지만, 레오에게 에미는 '행복한 꽝'이고 '희망없는 미래'라는 점이 두 사람 사이에 좁힐 수 없는 틈으로 존재한다. 누구 하나 부추길 수 없는 두 사람의 상황은 에미와 레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해 주고, 이 긴장감이 깨어지게 되는 것은 놀랍게도 에미의 남편에 의해서다. 이것이 이 책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에미와 레오의 이메일 편지로 가득 채워진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특이하고 특별하다. 두 사람의 신경전과 말장난에 지칠 때 쯤이면 다시 새로운 편지들을 쏟아내면서 독자의 관심을 모은다. 그리고 글자 속에 담겨 있는 에미와 레오의 사랑과 우정 그 미묘한 감정들에 독자들도 함께 동요되어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다. 그 바람에 몸을 맡기면 책은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로 독자를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이게 정말 끝이야???!!!" 물음표와 느낌표를 백만 개쯤 붙이고 싶게 만드는 툭 끊어진 결말에 한참을 어리둥절해 있었다. 다행히 나보다 먼저 작가에게 후속편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 다른 독자들 덕분에 나는 곧장 <일곱번째 파도>까지 이어서 읽을 수 있었다. 만일 <일곱번째 파도>가 출간되지 않았다면 나는 크게 낙심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는 이 책의 결말과 같은 끝맺음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작품의 여운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을만큼 에미와 나를 패닉 상태에 빠트린 결말이었다.
이미 <일곱번째 파도>까지 읽고 나서 쓰는 서평이라서 나는 이 두사람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에미와 레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이 두 권의 책은 꼭 세트로 한꺼번에 읽기를 권한다. <일곱번째 파도>까지 읽고 나서야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1, 2권을 나누어 출간되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이 책만 놓고 보자면 확실히 재미는 있지만, 허전한 구석도 많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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