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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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내가 보리라 예상했던 건 은은한 로맨스였다.
책의 정보는 일부러 찾지 않은 상태에서 제목만으로 그런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읽게 된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장편이 아닌 단편의 모음이었고, 달콤한 로맨스 대신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이 깃들어 있었다. 이렇다 보니 부푼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정작 도착한 곳은 내가 가려던 곳이 아니었을 때의 심정. 딱 그것이었다. 게다가 첫번째 이야기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를 읽는 동안에는 자꾸만 내 머리를 파고드는 <더 리더>의 연상연하 커플을 애써 지워야 했다.
낯설고 또 낯선 느낌.
최근 자주 듣게된 '김연수'라는 이름 석 자가 너무 익숙해서 그가 전하는 이야기들도 친숙하리라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이 책은 그간 김연수 작가가 발표한 9가지의 중단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기억할 만한 지나침>,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내겐 휴가가 필요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달로 간 코미디언>이 그 주인공 들이다.
이 중 <달로 간 코미디언>에 등장했던 구절 중 이런 것이 있다.
소설가에게 고통이란 자기가 쓴 소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안 팔리는 일이지요. (달로 간 코미디언 p.232)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본문들 보다 훨씬 친절했던 '해설'이 없었다면 김연수 작가도 나로 인해 약간의 고통을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의 몇 가지 이야기들은 '해설'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말과 문장에 내가 아닌 해설자의 의미부여가 더 와닿는 슬픔을 경험해야 했다.
한 세계의 붕괴, 그리고 소통의 부재.
따로 놀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이 두가지 굵은 밧줄이었다.
그 짙고 옅음의 차이는 있으나, 두 주제는 모든 이야기에 스며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지금 곁에 있거나 없는 사람들, 혹은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 즉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말과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소통할 수 없는 사회.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며, 앞으로도 살아갈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한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래...그랬군..." 이 한 마디면 족한 일이기도 하다.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을 때 작가가 보여준 다양한 소통의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내가 김연수 작가와 이 책으로 처음 만나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작품을 전혀 모르니, 난 그의 세계를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가 쓴 글을 읽으며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그래... 그랬군...", "난 잘 모르겠어" 하며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구태여 파고드는 사고(思考)의 번거로움 때문에 말이다. 그럴꺼면 이 책은 대체 왜 읽었나 싶을만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마저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소녀가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발가락 끝을 적시던 바닷물이 정강이를 지나 무릎에 닿고 계속 차올라 결국 그 속에 푹 잠긴다. 내게 이 책도 그 바닷물과 같았다. 다시 읽기 시작한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발만 담궜는데, 네 번째 이야기 정도 이르자 어느새 허리까지 물이 왔고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 마지막에는 머리까지 물 속에 쑥 밀어 넣었다. 흠뻑 젖어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으로 인해 '김연수'라는 새로운 세계는 만났다.
생각해 보면 이제 처음 만난 셈인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이심전심의 경지까지 바라는 건 내 욕심이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지금보다는 친해져 있을테고, 그 때는 당신에 대해 이만큼 밖에 알지 못했지만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다른 모습이 궁금했다 말하며 서먹했던 첫 만남을 추억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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